이 별에서 만난 일상을 위로하는 시
-정세훈
철이 바뀌자 아내는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한 보따리 얻어 왔습니다.
이웃집 홍선생님 댁에서
입던 헌옷을
또 얻어 왔습니다.
잠바며
티셔츠며
바지며
입힐 만한 옷은
모두 다
싸가지고 왔다 합니다.
엄마가
주섬주섬 풀어놓는
헌옷들을
이것도 입어보고
저것도 입어보던
우리집 아이들은
말없이
쳐다만 보는
축 처진 내 가슴에
새옷 같은
한마디를 던져줍니다.
"아빠, 미안해하지 말아요."
대학교 1학년 늦가을로 기억한다. 한참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의 시집들을 사서 모았던 시절. 그 때 알게 되었던, 박노해와 김기홍... 백무산 등의 노동자 시인들의 시들은 한 마디로 고통이자 충격이었다. 시란 아름다운(?) 서정을 치밀한 언어의 구조물로 구현해 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철부지 국문과 생에게, 시는 그저 지금 자기가 디디고 있는 땅 위에서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삶 그 자체라고 말했던 그들의 시. 시들.
그 때 이 시인의 시를 읽게 됐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공장노동자로 일해 왔다는 간단한 약력의 정세훈 시인. 자본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열찬 투쟁을 노래하는 강한 노동의 시들보다 나는 이 분의 시들이 좋았다. 그저 한 가정을 이룬 노동자가 핍진한 가난 속에서 어떤 일상과 삶을 살아가는지를 나직이 들려주는, 문학적 비유나 상징 등의 그 어떤 양념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평범한 시. 그러나 평범 속에 눈물과 따스함과 쓸쓸한 행복을 성찰하게 해 주는 시.
새벽녘이면 자는 누이들과 어린 나를 깨우지 않고 늘 리어카를 끌고 귤을 팔러 가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가끔 외가 쪽 친척에게서 얻어 오곤 하던, 그 파란 비닐 속의 옷, 옷들. 이것저것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냈을 때의 그 쓸쓸했던 기쁨과 환희.
그 때 구멍난 엄마의 런닝구를 떠올린 속 깊은 누이들은, '새옷 같은' 한 마디씩을 엄마에게 던지곤 했었다.
"엄마, 이 옷 너무 예뻐요."
*작가: 정세훈
*출판: 창비(창작과비평사)
*발매199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