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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Apr 21. 2023

나희덕의 '난파된 교실'

이 별의 고통과 기억에 대한 시

난파된 교실                   

                                    -나희덕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교실에서처럼 선실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그 말에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앉아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조립을 기다리는 나사들처럼 부품들처럼

주황색 구명복을 서로 입혀주며 기다렸다

그것이 자본주의라는 공장의 유니폼이라는 것도 모르고

물로 된 감옥에서 입게 될 수의라는 것도 모르고

아이들은 끝까지 어른들의 말을 기다렸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누군가 이 말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몇 개의 문과 창문만 열어주었더라면

그 교실이 거대한 무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파도에 둥둥 떠다니는 이름표와 가방들,

산산조각 난 교실의 부유물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지만

배를 지키려는 자들에게는 한낱 무명의 목숨에 불과했다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몇 만 원짜리 승객이나 짐짝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는 저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있었지만

싸늘한 시신을 안고 오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햇빛도 닿지 않는 저 깊은 바닥에 잠겨 있으면서도

끝까지 손을 풀지 않았던 아이들,

구명복의 끈을 잡고 죽음의 공포를 견뎠던 아이들,

아이들은 수학여행 중이었다

죽음을 배우기 위해 떠난 길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 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2014년 4월 16일.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담임이었고, 아이들과 문학수업을 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배의 모습과 얼마 후의 '전원 구조'라는 새빨간 오보를 믿으며 수업을 들어갔으며

또다시 보여주던 기울어진 세월호.

한 주 전, 제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2학년 담임샘들은 너도나도 깊은 탄식과 함께 안도감을 드러내었고

설마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모두는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구조될 거라 믿었다.

그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저 모욕과 모멸의 시간들은 차마 입을 떼고 싶지 않다. 

그건 분명 인간의 역사가 아닌 야만의 시간들이었기에...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때마다

내가 가르치는 어린 벗들도 변하고 흘러갔지만

4월 그 때가 다가오면

말할 수 없는 어떤 부채감 때문인지

어린 벗들에게 그 고통을 다룬 글들을 읽어주곤 했다.


그렇게 읽어주었던 글 중에

나희덕의 '난파된 교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통증과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 고통 너머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만히 있으라' 와 '움직여라'라는 저 대비의 명령어는

여전히 지금 내가 서 있는 교실에 대해

그 교실 안의 순하고 착한 어린 벗들에 대해

끊임없이 뒤돌아 보게 하기 때문이다.


경쟁과 효율이라는 자본의 가치가

우리의 모든 일상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

너덜너덜해지는 삶 속에서

교육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질문은 아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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