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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Feb 13. 2023

신현정의 '빨간 우체통 앞에서'

이 별에서 읽은 사랑의 시

빨간 우체통 앞에서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 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지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손수 편지지를 고르고 골라 아끼던 펜이나 연필로 꼭 꼬옥 마음의 글자를 눌러쓰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있다.


갓 태어난 새의 알처럼 생명의 따스함을 품은 편지를 넣은 편지봉투의 

오른쪽 가슴 위편에 풀을 칠하거나 '혓바닥을 넓게 해' 침을 발라 붙이던 우표.


저마다의 사연과 마음의 물건을 어딘가로 보내려는 우체국도 있었지만, 

그곳으로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조차 숨기고만 싶은 

나만의 비밀스런 결고운 사연을 띄우려면 우체통이 필요했던 시절. 빨간 우체통.이 필요했다.


만약 새를 띄워 내 마음을 알리고자 했던 대상이 이미 나를 떠난 사람이었다면... 아직 나 혼자의 가슴 속에서만 품고 있는 짝사랑이었다면... 결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는 시인의 말대로 '그냥' 돌아'왔다'. 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사랑이 깊어져 외로움도 깊던 내 마음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우체통

안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다 다시 손을 뺐을 것이다.  


'새'는 분명 편지의 메타포지만, 나의 이 지상의 영역이 아닌...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랑하는 '그대'의 은유다.


따스하고 담백하게 표현된 빨간 우체통의 시는 사실 너무나 뼈아프게 아픈 시다. 

나에게도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다시 가슴에 '꼬옥 보듬어 안고' 돌아왔던 

'새'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결코 간직할 수 없는 새. 새들.


지금은 '주소'도 '우편번호'도 없는... 어느 하늘 아래를 그 새들은 훨훨 자유롭게 날고 있을 것이다.


잘 가라~~ 사람아. 사랑아. 



--'어느 하늘 아래를 그 새들은 훨훨 자유롭게 날고 있을 것이다', Pixabay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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