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소보로
[김빵수씨의 取味생활 4] -벌거벗은 소보로
북한산 끝자락 정기를 마시며 일어난지 6일째, '적응'과 '순응'이라는 말의 차이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자연에 '순응'해보고자 이곳으로 어기적 어기적 기어들어왔으나, 생각보다 강한 내적 반항에 당황하며 적당히 '적응' 하려 노력중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운동겸 '마와리 탐색'겸 집근처 역에서 내려 20분을 내리 걸어 집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집을 나설때 돌아올 때 두번 씩 반복하니, 하루에 1시간 20분정도는 걷는 셈이다. 집 앞에 무엇이 있고 누가 사는지 일주일이면 파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처음엔 등산로 앞이라 막걸리나 두부집 정도만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제법 큰 전통시장도 있고, 마트도 있고 심지어 속속들이 '불금(불타는금요일)'의 장소들도 많다. 주말이면 홍등으로 눈이 부실정도니, 이 곳 참 재미있단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내 호기심을 잡아 끈 것은 바로, 어처구니없고 실망스럽게도 집 앞 5분거리에 위치한 파리바게트. 평범해보이는 이 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그 어느 '빠리바게트'에서도, '빠리 바게트 카페'에서도, (과장을 보탠다면 빠리바게트 할아비가 만든대도 절대 가능할 것 같지않은) 환상적인 자태의 '소보로빵'이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소보로. 아쉽게도, 성스럽게 피어난 크랙을 찍지 못했다. 그저, 글보다 앞선 필자의 식욕을 탓하시라.
고온에서 적당히 익혀낸 듯한 노릇노릇한 겉면하며, 폭신폭신한 속을 예상케하는 윤기와 수분. 무엇보다 내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것은 마치 한 송이 해바라기를 보듯 '기가 막히게' 만들어 낸 소보로크랙(소보로빵 위에 얹혀진 바삭하고 고소한 땅콩맛크래커류)이었다. 일반 빵에는 그저 위에만 “얹어있기만”크래커가 , 세상에! 이곳에는 해바라기꽃잎처럼 넓다랗게 빵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하나씩 뜯어먹으란 듯이, 애초부터 이렇게 따로 먹는거 아니었냐 되묻듯 말이다.
평소, 소보로(혹자는 소보루 등의 다른 이름을 주장하나, 나는 처음부터 이 빵은 소보로가 아닌 그 어떤 이름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겠다) 에 붙은 땅콩크래커를 좋아해, 그것만 톡톡 띄어먹었던 나는 크랙이 '조금만 더 컸음 좋겠다'고 아쉬워한 적이 많았다. 손가락 한 마디의 반의 반도 안되는 좁쌀만한 그 것을 골라내면서 베이킹을 진지하게 배워야하나 하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달콤한 그것만을 뽑아먹고 난 자리에는 원형탈모처럼 휑해졌다. 남은 흰빵은 우유 없이는 못먹었다. 진짜 맛없었다.
그런데, 이 고민을 한방에 날려준 '훈빵'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의 소보루빵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개인취향을 고려해 준 듯, 맞춤식 크랙을 내주는 센스, 게다가 카스테라의 빵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빵을 돌려가며 크래커를 까먹어도 빵 위로 한참이나 소보루를 쌓아둔 배려.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파리바게트가 아니라, 파리소보루 수준이었다.
그것마저 다 뜯어먹고 오롯이 '나체'가 된 성스러운 소보루여. 더구나 흰빵만 씹어도 고소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터져나왔다.
'벌거벗어 당신, 참 예뻐'.
때론, 무심한 듯 한 행동 하나가 타인을 감동시킨다. 동네 파리바게트 파티쉐의 대강 흩뿌려놓은 땅콩반죽이 나를 이렇게 들뜨게 할 줄, 그는 알았을까.
항상 보스락거리는 부스러기를 얹고 살다 내 앞에서 부끄럽게 흰 엉덩이를 드러낸 소보루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맛은 빵수씨도 춤추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