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자, 꽃이 쏟아져 내렸다.

[#27. 신호등과 건널목사이]

아닌 줄 알면서도

네 말이 서운할 때가 많았다.


의미없이 던진 말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시렸던 적이 많았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네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네 말이


문득

밤을 새워도 풀 수 없는 방정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네가 보내는 그 어떤 신호도

읽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엔

마음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다리가 있다는 걸.


붉게 번지는 울음을 들으면서도,

파르르 떨리는 두 입술을 보면서도,

무너져내리는 기억을 느끼면서도,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순간도 있다는 걸.



우리의 신호는

자주 엇갈렸다.


종종 신호들을 보고서도

길을 건너지 못했고,


신호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도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우린 서로를 향하는

신호들 사이에서

오히려 길을 잃고 있었다.


네 웃음을 보고

한 걸음에 뛰어간 그 곳에

너는 없었고


네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려 발길을 떼려 했을 때,

이미 너의 신호는 희미해진 뒤였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신호를 등에 지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을 때,


신호도 건널목도 사라진

감정의 공터를 혼자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을 때,


비로소 보았다.


앞으로만 뛰어가느라

너에게만 달려가느라

신호만을 주시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미처 담지 못한 것들이

미처 듣지 못한 것들이


늦가을의 꽃잎처럼

와르르 쏟아져내리는 것을.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너라는 신호와

우리라는 건널목이 없이도,


지구 반대편의 눈은 쏟아져 내리고

적도의 빛은 힘차게 뛰어오른다는 것을.


뒤돌아선다는 것이

그 어떤 끝, 실패 혹은

용기없음이나 비겁함으로 가득찬

후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같은 시작점을 가진

또 다른 출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더이상 나를 가로막았던 네 손짓이,

가다 멈춰선 내 발걸음이,

우리의 부재가,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멈추라던 너의 신호도,

내 신호를 오독했던 너의 지난 날들도,

서운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텅 빈 기억들마저도

씩씩하게 갖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건널목은 건너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싱겁고도 싱거운 문장을

믿어보고도 싶어졌다.


그저, 너에게

나지막히 이렇게

속삭일 것이라 다짐하면서.


조금만 물러서 있을 게.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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