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8
1.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싸움이다. 물론 두 사람이 만나 격투를 벌이거나 서로의 얼굴에 침방울을 튀어가며 격론을 나누지는 않았다. 싸움은 미적분이라는 인류사적 저작권에 관한 진실공방이라 할 수 있다.
뉴턴은 1665년, 23살의 나이에 미적분이라는 아이디어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밀이 많은 천재는 지도교수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는다. 뉴턴보다 4년 늦게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한 라이프니츠 또한 천재였다. 법률가, 철학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물리학과 공학에도 공헌이 컸던 그는 느지감치 수학에 빠져 5년 만에 미적분의 기본원리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684년에 논문으로 출간한다.
미적분에 관한 아이디어를 먼저 완성한 사람은 뉴턴이라는 사실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정식 이론으로 먼저 출간한 사람은 라이프니치이다. 요즘처럼 엄격하게 저작권 몰아주기가 있었다면 라이프니츠의 승리일 것이다.
여기에 미심쩍은 정황이 있다. 1676년 영국을 찾은 라이프니츠는 부탁을 받고 뉴턴의 원고 일부를 필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뉴턴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수학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때 뉴턴이 미적분에 관한 의견을 보내기도 했으나 핵심 부분은 알아보지 못하게 암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 시간은 흘러 1699년, 뉴턴의 추종자들은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라이프니츠 또한 이에 대한 반론을 학술지에 게재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704년, 처음 미적분에 관한 아이디어를 완성하고 40년 만에 뉴턴은 학술지에 정식으로 미적분 이론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라이프니츠에게 미적분의 내용을 알린 적이 있다고 적시한다. 1676년에 보낸 편지를 언급한 것이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노골적으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라이프니츠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시 반론을 펼쳤으며 지지자들과 함께 여러 방법으로 응수했다. 그러던 중 라이프니츠는 1711년, 영국왕립협회에 공정한 판정을 의뢰한다. 그러나 협회는 일단 뉴턴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음 해에는 미적분 선취권 조사위원회가 다시 꾸려졌고 1713년에 그 결과로 보고서가 나온다. 그리고 보고서는 ‘뉴턴이야말로 첫 발견자이고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편지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발표한다. 완벽하게 뉴턴의 입장에 서서 뉴턴의 손을 번쩍 들어준 것이다. 이후 실의에 빠져 지내던 라이프니츠는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알려진 사실이 있다. 당시 왕립협회 회장은 다름 아닌 뉴턴이었고, 그는 회장으로서 선취권 조사위원의 선정에서부터 보고서의 편집까지도 관여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 입장에서는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미적분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방식은 달랐다. 뉴턴이 물리적 운동의 개념으로 미적분에 접근했다면 라이프니츠는 다분히 기하학적 논리로 이론을 끌고 나갔다. 여기에 라이프니츠가 뉴턴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억울한 부분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라이프니츠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만한 사실도 있다. 이후 미적분은 주로 라이프니츠의 방법을 따라 발전했으며 그래서 현재의 미적분 표기법은 라이프니츠의 것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
천재들의 힘으로 인류는 자연의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반면 자연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천재를 만들기도 하지만 천재를 완벽한 인간으로는 만들지 않기에 이렇게 열심히 싸우기도 한다는 사실.
2.
혼자 싸울 수는 없지만 혼자 시소에 앉는 일처럼 혼자 기울어질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