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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Jul 21. 2024

싸움의 어떤 종류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4-2

 이제 총장님 얘기를 해야 한다. 총장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대학이나 어떤 총포상과도 관계가 없는 그를 왜 그를 그렇게 부르는지, 이유와 기원을 아는 사람을 굳이 찾자면 어딘가 있겠지만 나는 찾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니 마을의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일도 나쁘지 않겠다. 그는 항상 목적이 있는 싸움을 하고 거기서 실질적 이득을 얻어낸다.

 역시 60대 여성인 총장님의 외모는 어디서나 만나는 또래 사람보다도 더 평범하다. ISO 9001, 아니 KS인증 파마머리에 동그란 금테안경, 항상 바쁘게 펄럭이는 헐렁한 몸뻬에 매칭한 꽃무늬 티셔츠로 설명가능하다. 말은 바닷가 쪽은 아닌 내륙형 충청도 사투리를 아주 빠르게 구사하는 데다 쉽게 잘리지 않는, 목적 지향적인 것이었다.

 총장님 싸움의 대상은 주로 관공서이다. 사실 시민과 관공서는 적이 아니다. 시민은 세금을 내고 기관은 행정서비스로 보답한다. 이것이 원칙이지만 많은 경우 현실에서는 맥을 달리한다. 이제 총장님의 싸움을 들여다보자.

 총장님의 무기는 핸드폰과 박카스이다. 먼저 핸드폰은 광범위한 정보 검색의 기반이자 현장을 기록하는 눈이다. 마을은 작은 산이 만든 언덕의 경사를 타고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이 오래된 주택들이다. 경사가 끝나는 즈음 편도 1차선 도로가 마을의 아랫단을 감싸고 있다. 이 도로변에 4층짜리 건물 철거공사가 시작되었다. 소음과 먼지는 마을 사람들의 것이다. 총장님이 나타나 주변을 살피며 몇 장 사진을 찍고 사라졌다. 며칠 후 잠시 공사가 중단되고 비계와 가림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불법이여요. 그거 먼저 설치혔어야지.”

 공사기간 동안 불가피하게 공사트럭들이 인도에 주차하고 있었다. 적법은 아니지만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이해한다. 이때 핸드폰을 든 총장님이 나타난다. 그리고 번호판을 가린 차들에게만 다가가 사진을 찍는다.

 “나도 이해허지. 일은 해야허잖유. 근디 왜 가려? 번호판을. 그건 잘못이지.”

 이제 박카스의 예이다. 총장님은 민원실에서 공무원을 만나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든 말을 붙이기 전에 먼저 박카스 한 병을 내민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람 사이에 있는 벽에 생각보다 큰 구멍을 내준다.

 마을 도로와 접한 인도는 마을처럼 오래된 빨간 벽돌이 깔려있으며 군데군데 파여 걷는 사람들이 흠씬 놀랄 때가 많았다. 조명도 어두워 밤이면 어르신들에게 위험요소이기도 했다. 총장님은 잘 정돈된 민원서류와 박카스 한 병을 들고 민원창구로 다가간다.



 이쯤 되면 공무원들이 싫어하는 악성민원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총장님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행정적으로 합리적이며 공무원의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다 강력한 끈기마저 장착하고 있다.

 민원을 시작할 때에는 절대 계통을 무시하지 않고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방귀 쫌 뀌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맥도 자랑할 겸, 바로 중급관리자들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지만 총장님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담당자와 계통을 존중한다.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민원과 지속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비결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자와 구의원 한 명이 실사를 나온다.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총장님이 함께하는 일은 당연하다. 계획에 없던 길 위의 브리핑이 시작된다.

 “이 길이 저짝 삼거리부터 땡땡고 오거리까지 오백오십 미터여요. 이 길 주로 댕기는 양반들이 저기 복지관에 다니는 노인네들이고. 길이 뭔 꼴이냐고요. 세상에 구청에서 10분 거리인디 저기 보도블록 다 깨지고 웅덩이 지고 이렇게 창피한 데가 있냐고. 그리구 보셔요. 이 길에 가로등이 18개가 있는디 몽땅 도로 쪽으로만 있잖유. 인도는 깜깜해두 되나요? 라이트 있는 차헌티는 불 켜주구 사람 다니는 길은 더듬더듬 알아서 댕기라고요? 요즘 인도 가로등도 다 있잖유, 그리구 가로등도 다 LED로 혀야지.”

 “아, 예. 문제가 많군요. 예산 따져보구 가능한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1억 5천 정도 예산이면 길은 깔 것 같은데. 뭐가 많이 부족헌가요?”

 “지금 이것저것 할 게 많잖아요.”

 “예비비도 있을 텐디. 그걸루 보태서 올해 안에.”

 “여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다른 곳도.”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보도블록 교체는 금방 이루어졌고 가로등에 인도 쪽으로 머리를 하나 더 다는 공사는 그해에 절반 다음 해에 절반 모두 달았다. 물론 가로등도 모두 LED로 바뀌었다. 다음 해로 미루어진 공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직접 들어본다.

 “나머지 공사를 위해서 10달 동안 계속 문제를 제기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하면 공무원들도 피곤할 테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주무관님 힘드시죠?’ 이렇게 찾아가는 거여요. 신임이거든요. 작년에 담당했던 사람이 옆자리에 있어요. ‘저분한테 확인해 보세요. 약속했어요.’ 이렇게. 그리고 석 달에 한 번은 과장님도 찾아가고. 필요하면 의장님도 찾아가고. 그렇게 열 달 만에 공사 마쳤어요.”
  그리고 놀라운 점은 민원에도 AS가 있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일한 공무원을 위해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승진 청원을 넣은 것이다. 기술직으로 오래 근무한 공무원이었고 일하는 데 있어 성심을 다한 이에게 할 수 있는 한 보답으로 승진을 이끌기도 했다. 싸움으로 치면 훈훈한 것이고 싸움의 결과로 보자면 따듯한 것이다.

 총장님 얘기는 조만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다. ‘등기부등본, 사기와 싸우는 무기’ 이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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