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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Jul 07. 2024

세상과 싸운 사람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3

 1.

 세상과 싸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뭐 그냥, 마음대로 거칠게 정의해 보자. 저 바깥에 세계가 있다. 우리가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는, 우리와 거리를 두고 우리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객관적 환경이라고 할까. 세계는 거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며 나름대로 해석한다. 이 해석들의 합을 세상이라고 해보자. 세상은 세계를 배경으로 모인 인간들의 합이자 인간들이 세계를 바라보며 꾸는 꿈이다.

 그래서 세상과 싸운다는 얘기는 세계를 오해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인간들과 싸운다는 얘기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싸움은 목숨을 요구한다. 잘못된 세상은 필시 세계에 대한 무지와 무지에 대한 믿음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과 싸워 치르는 대가로의 목숨은 무지와 폭압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맹신과 싸웠던 갈릴레이는 슬쩍 한발 물러섰고 무지와 싸운 다윈은 책의 출간을 가능한 뒤로 미뤘다. 암흑 같은 시대와 싸웠던 전태일은 우물쭈물하지 못했다. 이런 맞짱족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2천여 년 전에 살았던 예수일 것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말했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세계를 엿본 이는 세상을 바꿔야 했다. 싸워야 했다.     


 2.

 이것도 싸움일까? 낱개의 인간으로 세상과 싸우는 일을 우리는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뭔가 대등한 부분이 있어야 싸움이 성립할 텐데 그 큰 대상을 상대로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할까?

 그래서 전형적으로 목숨을 요구하는 싸움이었고 예수 또한 기꺼이 그것을 내놓는다. 경전대로 따라 읽자면 그는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미리 알고 정하신’ 유일신이자 아버지의 계획대로 그는 목숨을 내놓았다. 죽을 줄 알고 죽은 것이다. 비극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렇지 않다. 그럴 줄 알고 행하는 일은 의미도 긴장도 이유도 없다. 사건이 없는 것이다. 제시간에 오는 버스는 그냥 버스이다. 버스가 늦어야 사건이고 일찍 오면 더 큰 사건이다. 무엇이 올지 몰라야 삶이고, 알고 하는 일로 우리는 시간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비극은 다르다. 알고도 맞아야 하는 비극이야말로 그 무게를 더한다.

 테드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여주인공에게는 미래도 과거와 같은 기억이다. 그래서 다가올 비극을 알고 있음에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비극이다. 인간이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예수가 한 말이다.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 싸움에 있어 승리도 패배도 아닌 하나의 비극, 하나의 이야기를 다 이루었다는 말 아닌가?      



 3.

 이것도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의 비밀을 엿본 사람들에게, 그렇게 깨달은 자들에게 이 무지한 세상은 싸움의 대상이 될까? 자기 앞의 생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욕망에 쥐여 휘둘려 한 치 앞도 못 보는 중생 무리가 싸움의 대상이 될까? 지나던 어른이 쭈그려 앉아 아이들 소꿉장난에 끼어 잠시 노는 일 아닌가? 바지 털고 일어나면 우스운 일의 끝 아닌가? 

 사람이 사는 일 자체가 이렇다 한 근거가 없는 일이기에 기회만 있으면 허약하게 허물어진다. 살아있다는 믿음 또한 사이비 종교 같은 구조라 쉽사리 내빼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실을 시람 당사자만 모르고 있다고 치자. 과연 싸움의 상대가 될까? 그들에게. 

 경전에 따르면 예수는 유일신의 아들이다. 수많은 신들이 난무하던 세상에 어느 순간 유일신이 등장했으며 그는 소급하여 세상까지 창조한다. 그리고 외아들이 인간 세상에 나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물론 인간이 모인 세상은 우매한 데다 갈 곳을 모르고 서로를 죽인다. 그는 인간적이고 혁명적으로 싸움에 임했으나 누군가에겐 ‘미리 알고 정하신’ 싸움이다. 이 싸움에는 내가 묘사할 활극도 없고 풀어놓을 긴장과 갈등도 없다. 경전에 다 있다.

 경전에 따르면 그는 죽었다 살아났고 이후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이 말을 쓴다) 어차피 올라갈 일을 굳이 왜 살아났을까? 싸움은 절박하기 때문에 싸움이다. 그리고 이 절박함의 근원은 사람에게 죽음이 한 번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절박하지 않은 싸움을 한 것인가? 누군가는 인간적인 생명을 담보로 세상과 싸우기는 했으나 그 생명이 하나가 아니었던가? 다시 할 수 있는 보드게임에 절박함의 정도를 매기면 몇 점이나 나올까?

 무지한 인간은 아직도 세계를 모른 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걸 보면 그가 세상과 싸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 같은데, 무엇을 다 이루었을까?       


 4.

 이것을 싸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런 경우, 싸우지 않으면 고민할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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