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3
1.
뭐니 뭐니 해도 싸움 중 최고의 구경은 활극이다. 너무 오래된 단어인가? 활극이라니. 활극은 사전적으로 난투, 그러니까 서로 덤벼들어 어지러이 싸우는 연극이나 영화를 말했던 사어이다. 이 단어 또한 누군가에 져서 죽은 말이다. 싸움에 이겨 이 시대를 주름잡는 단어는 액션이다.
사람들이 액션을 즐기는 이유를 따지는 일은 뻔하다. 내 안에서 들끓지만 현실에서 드러낼 수 없는, 드러냈다가 큰일 나는, 폭력적 본능을 어르고 달랜다고 할까? 프로복싱이 흥행하던 시절 함께 중계를 보는 모든 남자들의(나이가 어리든 할배든) 움찔움찔하던 어깨를 기억하면서 감정이입, 대리만족 뭐, 이런 정도로 끝내자.
활극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싸움 능력에 관한 시뮬레이션은 있었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붙여본 이후 이소룡과 성룡이 강제로 한판 뜨고, 태권브이와 마징가제트를 한 링에 올리곤 했다. 그래서 이때 누가 이길까? 당연하게도 목소리 큰 아이가 미는 주인공이 이긴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와 철저한 논리로 무장한 아이가 미는 주인공에게는 잽이 안 되었다.
F4팬텀과 미그21의 작전반경과 무기장착능력, 레이더의 성능. 이런 정보들을 수치로 제시하는 정확한 목소리에 이길 자는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과 이소룡이 이기는 경우는 이런 정보의 힘이었고 태권브이의 승리는 뜨거운 민족주의의 발현에 힘입는다.
그래서 현실에서 싸움은 누가 이기나? 긴 시간 모아 온 내 정보로 판단하건대,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 (너무 뻔한가?) 싸움을 잘할 수 있는 싸움의 능력은 몇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먼저 싸움의 기술이다. 이것은 체력, 잘 싸우는 신체적 능력 등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정신적 요소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긴다는 독기와 순간적 판단력 등이 있다. 그리고 우연이라는 인간 외적 요소도 있다. 우리가 깊게 다루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승패를 결정하는 니케 신의 강력한 무기이다. 간혹 눈감고 휘두르는 소 뒷걸음질 펀치에 쓰러진 UFC 챔피언들은 모두 이 무기에 당한 것이다.
2.
나는, 싸움을 잘 했고 자주 했던 한 50대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태권도 선수로 활동했다. 선수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신체적 능력은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승부욕도 강했다. 정신적 능력치도 기본 이상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승부욕은 일상에서 고스톱 판 담요를 뒤집어버리는 일 같은 상당히 유치하게 발현되는 경우가 많아 길게 얘기 않겠다. 그리고 우연이다. 우연도 일정 부분 사람이 만드는 경우가 있다.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고는 멀쩡한 정신일 때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 스스로 넷 정도는 자신 있다고 말하는 이 남자가 그럼에도 자주 맞고 다닌 이유가 이것이다. 싸움의 현장이 대부분 술자리였기 때문이다. 술은 사람의 집중력과 균형감각, 운동능력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공중으로 솟구쳐 예의 멋지게 360도 회전 뒤돌려차기(그들은 회축이라고 부른다)를 해도 상대는 맞지 않는다. 먼저 거리조절에 실패했고, 멋지게 올라가던 발이 옆 테이블에 걸릴 확률이 높으며 착지에 실패해 스스로 바닥에 뒹구는 상황을 만든다. 사람 좋게도, 니케 신의 선택을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그냥 싸우지나 말지.
3.
십오 년은 충분히 지났을 시간, 어느 대도시 유흥가 자락이었다. 태권도 관장, 사범들 무리와 함께 2차로 자리를 옮기던 길이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였고 거리에서 그는 급히 오줌이 마려웠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건물들 사이에서 문이 열린 화장실을 찾아 후다닥 들어갔다. 오줌 때 낀 소변기 하나에 오른쪽으로 문짝이 달린 대변기 하나가 있는 아주 작고 지저분한 화장실이었다. 청소상태야 어쨌건 급한 사람에게는 비어있는 소변기는 천국의 땅으로 보인다.
그런데 왼쪽 벽에 기대어 한 명 오른쪽 문을 등지고 두 명, 이렇게 셋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오른쪽 바닥에는 둘이 뱉은 가래침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공간은 완전히 옛말로, 너구리굴 사냥터보다 심했다. 청소년이거나 잘해야 20대 초반이었다. 그래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급하게 소변기를 향해 다가가는 그를 보고도 왼쪽의 남자는 비켜주는 예의를 보이지 않는다. 급하기는 하지만 슬쩍 마음이 상한다.
몸을 부르르 떨며 배설의 쾌감이 절반 정도 지나자 그는 절반가량의 분노가 올라오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고 말을 건넨다.
“아니 젊은 사람들이 나가서 피워도 되겠고마. 글고 바닥에 그 침이 뭐요? 더럽게.”
그는 나름 점잖게 대사를 뽑았다. 아직 지퍼를 올리기 전이다. 답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 뭔데 그러냐고? 여기서 담배 못 피우게 돼 있는 것도 아니고?”
등 뒤 오른쪽 첫 번째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들아 여기가 이렇게 꽉 막혀 있는데, 저기 쪼그만 환풍기 하나 돌아가는데, 얼마든지 밖에서 피워도 될 나이 같은데.”
답은 욕으로 돌아왔다. 대개 욕지기가 도화선 역할을 한다. 그는 이미 지퍼를 다 올렸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며 왼 주먹이 ‘원’이 되어 첫 번째의 코를 향하고 오른손이 ‘투’가 되어 왼 턱에 들어간다. 담배는 주인을 잃고 바닥으로, 침 웅덩이로 떨어진다. 등 뒤에 있던 남자가 목을 끌어안는다. 물론 조르기 위해서다. 그는 오른쪽 팔꿈치를 돌려 두 번째의 오른 턱을 가격한다. 두 번째는 그대로 쓰러지며 방금 그가 소변을 본 변기를 왼쪽 볼로 베고 앉는다. 이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던 세 번째는 예상 가능한 앞차기 한 방에 그냥 주저앉는다. 작은 공간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넘어진 첫 번째의 얼굴을 고여 있던 침 웅덩이에 담가주고는 화장실 문을 연다. 짐짓 여유 있게 소리 내어 문을 닫고는 몇 걸음 후 골목으로 꺾어지자마자 부리나케 뛰기 시작한다.
“아 뭐, 걔들이 쫓아올까 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시끄러울까 봐 그랬지. 그리고 화장실이 너무 더러웠어. 그래서.”
4.
이런 싸움에는 좋은 편도 없고 나쁜 편도 없다. 서로 덤벼들어 어지러이 싸우는 활극일 뿐이다. 그러니 심각하지 않게 그저 오래되고 좀 지저분한 싸움 구경이나 한 번 했다 치자. 심각 안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