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호 Jun 21. 2024

그러니까 프롤로그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1

 1.

 욕망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욕망은 그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욕망은 생명체로써 지구상에서 살아있는 존재들이 가능한 오래 살아있기 위해 스스로를 추진하는 강력한 엔진이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생명은 살아 있으려 노력한다.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하고 또 먹히지 말아야 한다. 생태계 안에 있는 모두는 이 원칙에 따라 분투한다.

 살아있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존재를 떠올려보자. 그는 자신을 먹으려는 포식자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네가 그렇게 눈 뒤집어지게 배가 고프다면 기꺼이 나를 먹이로 제공하겠어.’라고 되뇔 것이다. 또는 ‘나는 몹시 달리기 싫다. 그러하기에 너는 오늘 배가 부를 지라!’, 생태계에는 이런 관용이 난무했으리라. 분명 사이좋은 광경이기는 하나 관용의 유전자를 가진 모든 종은 순식간에 멸종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으려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유전자에 코딩된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다.

 개체의 생존이라는 욕망의 표현형으로 벌어지는 싸움은 어떤 형태일까? 암사자가 어린 가젤을 쫓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 상황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포식행위이다. 그러나 다시 이를 싸움이라는 시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긴박한 순간, 사자는 사실 배고픔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도망가는 어린 가젤은 눈앞에 닥친 죽음과 싸우고 있다.

 싸움이라고 부를만한 상황이라면 어떤 면이든 대등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자와 배고픔은 대등하다. 가젤과 죽음은 대등하다. 이렇게 유추하면 결국 삶과 죽음의 싸움이 된다. 이렇게 벌어지는 싸움은, 누군가는 이기고 상대는 지는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종의 생존이다.

 개체가 아닌 종 자체가 살아남기 위해 열심인 활동은 생식이다. 짝짓기를 통해 자손을 만들어야 종이 살아남는다. 이것 또한 근원적인 욕망이며 모든 싸움의 뿌리이기도 하다. 배를 채운 개체들은 다음 순간 짝을 찾기 위해 일어선다. 그리고 싸운다. 암컷이건 수컷이건 대등한 개체의 싸움은 거의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이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욕망은 생명에게 신성神聖한 것인 동시에 생명에 깃들어있는 신성神性일지도 모른다.

       

 2.

 싸움은 욕망들이 현실에 몸을 드러내며 격렬하게 충돌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싸움의 현장을 살펴보면 욕망의 파편을 찾을 수 있고 그 파편을 들여다보면 욕망이라는, 사람의 멱살을 쥐어 끌고 다니는 제일 힘센 놈의 정체를 살짝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이것이 여러 사람들이 경험한 싸움 얘기를 넌지시 들어보기로 한 이유이다.

 싸움이야말로 구경거리 중 최고라고 한다. 내 안에 있지만 나는 감추고 싶은 그 날것의 욕망을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욕망의 알몸을 홈쳐보는 관음증적 자극이면서 동시에, 어느 한편에 자신을 동일시해서 얻는 강력한 대리만족의 현장이기도 하다. 싸움은, 이기든 지든, 몸이건 정신이건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야 끝난다. 사람들이, 이긴 이건 진 이건, 쓰러져 헐떡이는 피투성이들에 자신을 대입하며 만족한다는 사실은 사람 안에 자기 학대의 본능이 있다는 증거이다. 자기 학대는 자기 소멸에 관한 갈망이기도 하다. 활활 타올라 결국 사라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불구경이 우리 영혼을 훑어갈 만큼 매력적인 이유이다. 우리가 가장 재미있다고 꼽는 두 개의 구경은 그래서 한통속이다.

 하여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싸움의 기억을 듣는 일은 나를 움직이는 욕망의 정체를 알아나가는 일일 터이고 어쩌면 삶을 성찰하는 방법 중 하나이리라. 물론 나는 성찰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성찰이란 내가 고생해서 남 좋은 일 하는 대표적인 자학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나는 그냥, 남이 싸운 얘기 들어보는 일이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시작해 본다. 이것 또한 뭐 그런 욕망 중 하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