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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Jul 28. 2024

더위와의 싸움

-예정에 없던 싸움의 기록 7

 인간이 더위와 싸운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저 일상적으로 사용하니 그런 줄 알고 쓰고 있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온도 환경을 견디는 방법’ 쯤 될 터이다. 최근까지도 피서(避暑)라는 말을 많이 썼다. 말 그대로 더위를 피해 일시적으로 도망가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 할 수 있는 더위와의 싸움이란 것은 보통 에어컨의 그늘 안에 숨어있는 일을 가리킨다.

 사실 에어컨이 하는 일이란 아주 작은 공간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더 큰 공간에 더 많은 열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더위와의 싸움이란 전체적으로는 더 더워지는 악화일로의 피드백을 인간 스스로 반복하는 일이다.

 더위가 급피치를 올리기 시작한 1주일 전쯤 남자는 10개월 만에 처음 에어컨을 켰다. 벽에 매달린 채로 1년을 빈둥거렸던 에어컨은 입을 벌려 바람을 쏟아내기는 했으나 뭔가 모르게 게으른 움직임에서 나쁜 예감이 쏟아졌다. 어느 숨결에서도 냉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는 싸움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AS센터는 당연히 전화를 받지 않았고 홈페이지가 알려주는 가장 빠른 AS방문 일정은 1주일 뒤였다. ‘그보다는 일찍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일단 접수를 해놓고 동네 에어컨 설치점의 전화번호를 뒤졌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인에게 전화해 방법을 구하자 ‘봄에 미리미리 점검을 했어야지!’ 속 뒤집는 지청구만 돌아온다.

 다음날, 동네 설치점에서 기사 한 명이 냉매 가스통을 들고 방문한다. ‘어, 실외기가 안 도네. 간단하게 될 문제가 아닌데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다음 날, 에어컨 제조사의 AS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정보다 일찍 방문해도 되겠냐는 선심 어린 얘기였다. 어디 집 나갔다 돌아온 강아지와 비교할 일인가? 반가웠다. 그것도 잠시, 베란다 밖으로 허리를 내놓고 실외기를 살핀 기사는 절망의 말을 뱉는다.

 “인버터가 나갔네요. 부품이 오는데 5일 정도 걸리는데, 수리비는 45만 원 정도 나올 거고 결과도 100% 장담은 못합니다.”

 고민 깊은 장고에 든 남자에게 기사가 거든다.

 “저 같으면 새로 삽니다.”

 ‘이 여름에 에어컨을 새로 산다고? 그것은 다시 언제 올 것이며, 그간의 더위는 어찌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통장 바닥에는 남은 힘이 있을까?’

 이 싸움의 승패는 너무 자명한 것이다. 남자는 더 작은 용량의 에어컨을 선택해 통장의 바닥을 박박 긁었고 그러고도 3일을 더 기다렸으며, 약속한 설치 시간을 넘겨 또 한 시간을 끙끙 앓으며 기다렸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렸던 기억 이후 제일 긴 시간 중 하나였다.

 설치가 끝나고 흘러내리는 찬바람을 확인하고 나서도 하나 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나 그 일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남자는 다짐했다. 여름에 에어컨과 싸운 자신의 불찰이라고 생각하며 분을 삼켰다.

 이렇게 남자는 싸움이라고 할 만한 일을 겪었고 3개월 정도 노화를 앞당겼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짐했다. 여름에는 싸우지 않기로.

 남자는 25년 전 여름의 기억을 떠올렸다. 딸아이가 2살 무렵이었다. 아주 작은 집이었고 당연히 에어컨은 없었다. 얼마나 더웠을까? 짜박짜박 걸어 다니던 아이는 더우면 냉장고를 열고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몸까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아이가 매달린 냉장고 문은 수줍은 놀이기구로 변신해 천천히 열린다. 우지끈, 놀이기구가 떨어지면서 다시 냉장고 문으로 변신했다. 아이는 놀라지도 않았다. 또하나 여름과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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