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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Aug 19. 2024

그 식상한, 자신과의 싸움

거의 모든 싸움의 기록 10

 1.

 아주 지겨우면서 식상하기까지 한 말이다. 자신과의 싸움이야말로 가장 힘든 싸움이라는 주장. 정말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 다니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과는 어떻게들 싸우는가? 이기기 힘든 싸움이라고 모두가 합의한 싸움이니까, 싸움을 잘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이라고 이름표를 붙이고 UFC룰에 따라 격투를 벌일지도 모른다.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악다구니와 함께 튀는 침으로 자신을 도망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들 대부분은 외상도, 얼굴에 튄 침도 없는 걸 보면 운동선수들이 연상훈련 하듯이 눈감고 앉아서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여간 자신과 싸우려면 일단 자신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없으면 싸울 대상이 없는 데다 싸울 의지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없을 때 자신은 어디에 갔을까? 격투기 도장에 수련하러 갔을 확률이 높지만 잘 배워 자신이 돌아오면 내게도 자신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과의 싸움이 자신 있는 싸움이라 별로 힘들 것 같지 않은데?     


 2.

 식상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만한 상황과 비슷한 것을 알고 있기는 하다. 마감이다. 마감이 닥쳐오는 상황에서는 내 안에 누군가 있다. 그것이 자신이라고 한다면 그 자신은 악마를 닮아있다.  

 우리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마감은 정말 자신 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은 악마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며칠 더 남았잖아? 몇 시간 더 있다 시작해도 돼! 이 게임 몇 초만 더하자?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니? 그리고 죽으면 또 어때? 너 모든 일에 자신 있잖아. 죽는 일도.’

 정말 싸우기 싫은 데다, 백전백패의 이 싸움을 하는 동안, 그렇다고 정말 재미있게 노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게 흐르는 시간이나 세면서 누워, 자신이라는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딸램께서도 중요한 마감을 앞에 두고 초 단위로 재생되는 이 지극히 정상적인 루틴을 반복하다가 결국 3일 밤을 새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의미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마감이야말로 인류의 문화를 완성해 가는 강력한 추동력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왕은 딸들에게 ‘한 달 안에 이 방을 가득 채울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으로 방을 채운다는 구라를 완성한 양초라는 잔꾀가 아니라 ‘한 달’이라는 마감이다. 마감이 없었다면 그 방은 지루한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생각해 보자. 피라미드 또한 누군가가 정한 마감이 없었다면 영원히 공사 중일 것이고, 이집트 사람들은 관광 대신 다른 산업을 더욱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마감이 있는 산업으로.       


 3.

 나쁜 사람들이 있다. 마감이라는 자신과의 싸움을 남의 싸움으로 바꾸는 사람. 글 쓰는 사람들을 예로 들면, 마감을 정하는 사람은 편집진이다.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과정의 시간 탁자를 정하고는 글을 청탁한다. 마감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대개는 이 마감과 함께 등장하는 악마와 싸우지만 어떤 필진은, 첫 번째 교정, 두 번째 교정, 세 번째 교정까지 스스로 계산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마감을 자신이 정한다.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마감 사이의 시간은 편집진이 자신 안에 있을지 모르는, 남을 해치려는 또 다른 악마와 싸우는 시간이 된다. 심지어 인쇄 들어가는 날까지 마감으로 계산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또 그림판에도 있다고 한다. 약속된 전시 날짜에, 전시장에 액자까지 끼워 그림을 걸어놓고 서서 전시 오픈행사 시간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마감의 힘은 위대하고 마감에 닥쳐 자신과 싸우는 사람들은 더 위대하다.

 이렇게 얘기해 보니 자신이라고 불릴만한 나와 분리된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더위보다는, 자신이라는 자신 없는 존재와 싸우는 일이 더 낫다는 확신이 든다.     


 4.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말했다.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렇다. 자신이 있을 경우에 싸움은 잘하면서 악마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잘 속아 넘어가는 존재.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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