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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Apr 25. 2021

내복풍의 꽃무늬 여인을 위한 세레나데

그냥 내가 말하는 내 시 8

 내복풍의 꽃무늬 여인을 위한 세레나데          



 존재들 사이의 거리를 멀찌감치 떼어 놓기 위해 스스로 투명해진 가을볕은 때로 그 볕에 덴 사람을 아예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가을이면 그래서 추근추근 사람 곁을 채근하는 모양들 모두가 사람입니다 어떤 가을이었건 첫 번째 가을이 있었다는 사건을 지워진 사람이라면 짐작하고 있듯이 어떤 바람과도 처음은 있습니다

 강물에 그림자를 담근 당신을 보았다고 누군가 내게 일렀을 때 나는 지하도에서 밟은 작은 발자국 하나에 한나절 온전히 넋을 놓았다더군요 아랫배로 철딱서니 없이 번지던 노을에 손 담그지 않았나요 울적한 오해는 그렇게 암술을 내어놓았나요 첫가을이었나요 다시 마지막 바람이었나요

 그러나 당신과 나를 이루는 분자들 중 몇은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바람이었습니다 오래전 일이죠 지금 당신의 한숨은 누구의 축축한 망막이었고 지금 나의 미열은 누구의 통통한 허벅지살 어디, 그래서 서로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처음이었을까요 몇 덩어리의 세월을 앞서 당신은 바위의 각진 어깨였고 나는 떨어지는 빗방울로 한 번쯤 당신이라는 바위를 쓰다듬었지요 기억해요 당신은 소박한 그림자를 가진 한 뭉치 구름이었고 나는 구름의 그림자가 스쳐간 대지의 어느 조각이었더라도 아니 확인하지 않아요 기억해요 기억하면 그만입니다

 옷장 안 쭈그린 꽃들에게서 털어낼 수 없는 첫가을은 우리 시공간의 어디쯤에서 펄럭이고 있을까요 흔들리고 있을 겁니다


-시집 『밍글맹글에서 (파란 2018. 56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정신의 되먹임이다. 기억을 가지고 있는 무형의 정체성이, 또는 기억이 없더라도 정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무엇이 다른 몸에 깃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주 길고 먼 기억을 회복하기도 한다. 반드시 시간에 순행하기만 하는 않은 윤회는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종속적이지 않다.

 이런 윤회의 과정을 뒤적거려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찾기도 한다. 이때 달라이 라마는 몸이 다를지언정 모두가 그일 것이라는 정체성을 인정한다.


 현실에서 물질을 이루고 있는 작은 입자들은 실제로 윤회한다. 물질적 윤회이다. 46억 년 전 지구라는 커다란 범위 안에 든 입자들은 대부분 같은 입자로 몸을 바꾸고 있다. 뜨거운 마그마의 작은 부분이었다가 대기로 분출되어 식물의 잎사귀로 존재했던 수소와 산소와 탄소와 질소 분자들은 다시 원자로 쪼개졌다 재결합한다.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의 부분이었다가 분해되어 공기 중에서 기체로 떠돌고 어느 시간 공룡의 몸을 이루었을 것이다. 누구는 히말라야의 만년설로 휴식을 취했고 다시 대기 중에서 햇빛을 분광해 무지개를 만드는 수증기로 지낸다. 물질적 윤회는 재배열로 한동안 정체성을 합의하는 것이다. 멤버가 바뀌어도 하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록밴드처럼.

 차이가 있다면 수소원자는 다른 수소원자와 분간할 수 없이 완벽하게 같다. 그렇게 산소와 결합해 물분자가 되었을지언정 물분자와 다른 물분자는 완벽하게 같아 구별할 수 없다. 


 이 수많은 낱개들이 한동안 당신 몸을 이룬다. 우리 모두는 정말 잠시 반짝이는 현현(顯顯) 일뿐이다.


 봄이 피곤해질 무렵 가을을 떠올린다. 어제가 없는 오늘을 시작이라고 하는 일처럼 첫 번째 가을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시작이 놀랍고 모든 연애가 철없으며 모든 죽음이 속될지언정 삶은 이런 것들로 재배열된다.  

 당신은 몇 개의 가을을 지나쳤고 몇 개의 가을을 고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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