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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May 04. 2021

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22

밥만 주면 잘 자라는 아이

 며칠 전 커피가 담긴 소포가 도착했다. 형의 딸, 그러니까 1번 조카가 보낸 선물이다. 이것은 그 아이한테 받은 첫 선물이며, 가족 연대기를 연재하며 얻은 첫 번째 물질적 보상이다. 물론 비싼 커피는 아닐 것이라 확신하지만, 맛있게 마시면서 보상에 대한 보상으로 1번 조카 이야기를 꺼낸다.   



 23. 밥만 주면 잘 자라는 아이

   

 1번 조카는 1994년 봄에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역대급으로 더운 여름을 맞는다. 그 여름은 온통 이 조카의 것이었다. 시끄럽고 거친 아들 넷만 생활하다가 형이 결혼하면서 새 식구가 들어왔다. 그렇게 형수 덕분에 집안 분위기는 훨씬 부드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쌍둥이 이후로 25년 만에 새 생명이 탄생했다. 딸아이인 1번 조카가 태어난 것이다. 이후 상황은 상상 가능하다.     


 집안의 보배(?)이자 새 왕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왕은 성격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더운 여름 동안 왕은 바닥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안아서 애써 토닥여야 쌔근 잠이 들고는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을라치면 바로 깨서 울기를 시작했다. 아니 악을 써댔다. 그 작은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울음이,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일러스트 by 도터맨 20210504 No.1 -May the force be with You!


 형수가 재우고, 다음 할머니가 손주를 재웠다. 그리고 별로 지구력 없는 할아버지를 거쳐 삼촌들까지, 모두가 안아서 이 아이를 재웠다. 그 더운 여름 동안 이 아이는 바닥에서 별로 자지 않았다.

 집안의 첫 손주이자 첫 조카이니 얼마나 반갑고 예뻤을지 짐작은 간다. 기억은 안 난다. 그러나 예쁠수록 겉으로 덜 위해주어야 당사자의 성격 형성에 도움을 주고 가족이 평안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행하지 못했으리라.     


 지금 그때 사진을 보면 예쁘기는커녕 적잖은 심술까지 탑재한 꼬마 아이이다. 그럼에도 식구들은 누구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 부분에서는 부모야 그렇다 치고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의 사랑은 지극했다. 아니 착각도 지극했다.

 동네에 돼지갈빗집이 있었다. 그 집 사장님은 엄마와 같은 계원이었기에 가끔 식구들이 외식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는 집이었다. 외식업을 하는 사장들이 으레 그렇듯, 동네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날도 고기를 굽는 상 앞에 식구들이 앉았다. 상을 차린 사장님은 우리 엄마이자 아이의 할머니 뒤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고는 반갑게 이불을 젖히고 얼굴을 보았다. 다음 순간 보통은 조금 높은 톤으로 ‘아이고 이뻐라!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댜.’ 이런 수순이 상식이고 예의이며 계원의 도리이다. 그러나 그 사장님은 거짓말은 별로 못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뜻밖의 얘기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기가 견적 좀 많이 나오겠네.”


 남자들은 먹느라 별 신경 안 썼을 것이다. 농반진반이었을 이 말에 엄마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남의 집 귀한 손녀딸보고 견적이라니!”

 엄마는 화를 잘 숨기지 못했다. 당황한 사장님을 보고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식구들은 그 돼지갈빗집이 언제 폐업을 했는지 어디로 이전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가 단호하게 그 계원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이다.     


 1번 조카는 이런 보호와 착각에 근거한 칭송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 하긴 아이들은 밥만 주면 잘 자란다(?). 나는 이 조카아이를 몇 개의 의성어로 표현할 수 있다.

 ‘짜갈짜갈 따박따박 오몰조몰’

 이 아이는 뭔지 모를 주제로 짜갈짜갈 떠들다가 순간 따박따박 따지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오몰조몰 그 쬐깐한 입으로 뭔가를 먹고 있다. 내 기억에 이 아이는 항상 이 셋 중 하나였다. (말하고 보니 다 입으로 하는 일이다. 다른 누구보다 바쁜 입일진대, 나이 들어 짝을 만나 뽀뽀도 했을 것 아닌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바쁜 입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학창 시절도 좀 유별났던 모양이다. 쌍둥이 삼촌들처럼 대놓고 사고를 치는 유형은 아니었지만 뭐 이런 일들은 흔하디흔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 아이는 머리카락을 밝은 보라색으로 염색했다(내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이 조카가 손수 밝은 보라색으로 염색을 해주었다. 돈을 아껴주어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청년들의 내적 불안을 만천하에 드러내 주어 안 고마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한소리 듣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랄까? 문제는 닥친 졸업식이었다. 선생님들은 졸업식에 그 머리색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졸업식 하루 때문에 다시 염색할 수는 없다고 아이는 맞섰다. 그리고 졸업식은 가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찾은 해결책은 임시로 염색을 하는 것이었다. 염색약은 미술시간에 쓰던 포스터컬러. 아이의 아이디어에 아무 말 않고 검은색 포스터컬러로 아이의 머리카락 구석구석에 페인팅을 해준 사람은 아이의 엄마인 형수였다.

 문제는 졸업식 날 비가 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아이가 졸업식에 우산도 없이 가볍게 몸으로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걸어서 집에 왔고 백주대낮에 등장한 귀신에 놀라는 역할은 동네 사람들의 것이었다.     


일러스트 by 도터멘 20210504 No.2 May the force be with You! 흠매 무시라!

 하나 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버지 장례식의 일이다. 우리 집이 좀 거칠기는 했지만 여성에게 일을 떠맡기고 몰라라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거기에 1번 조카는 남녀 사이에 눈곱만큼의 차별이라도 보일 성싶으면 그 특유의 따박따박을 쏟아붓는다. 여기에는 위아래가 없기에 내심 아들 손주를 예뻐하던 할아버지가 최대의 피해자였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슬픔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오락가락한다. 조문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도 계기만 있으면 다시 울음이 몰아치고 또 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입관식이었다. 식구들과 함께 망자에 옷을 입히고는 떠나보내는 과정이었다. 떠나는 이의 입에 쌀알을 조금씩 넣는 상징적인 의식의 순서였다. 나는 이제 숨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의 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지발가락 관절이 튀어나온 저 발, 내 발이 꼭 저렇게 생겼다.      


 장례 진행자는 “자, 이번에는 장손 나오세요.”라고 말하자 형의 아들이 움찔 움직였다. 그때 누나인 1번 조카는 울고 있는 손으로 동생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섰다.

 “응, 엉, 엉엉, 제가, 흑흑, 제가 장손이에요. 엉엉.”

 장례식장에서 대여한 상복을 입은 다른 식구들과는 다르게 맞춤인 듯 예쁜 공주 상복을 입고 있던 1번 조카는 엉엉 울면서 자신이 장손이라고 나선 것이다. 장례 진행자는 놀라 두리번거리며 잠깐 말문을 닫았지만 다른 식구들은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 쿡, 웃었다. 그리고 모두들 침묵으로 순순히 인정했다. 내발이 닮은 못생긴 아버지 발이 슬쩍 움직였다. 돌아가시는 와중에도 한번 웃고 가시는 듯 살짝 움직였다. 1번 조카의 따박따박 때문이었다.      


 1번 조카는 지금 몸 안에 한 생명을 키우고 있다. 그래서 좋은 얘기로 응원하고 싶지만 기억나는 것이 전부 이런 일들이다.

 곧 한 아이는 세상에 나와 밥만 주면 잘 자랄 것이다. 이제 그 밥을 1번 조카가 주어야 할 순서이다. 그리고 자라는 그 아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따박따박 따지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자명하다. 다행인 건 그 불이 내게는 강 건너 불이라는 사실이다.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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