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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Apr 28. 2021

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21

무지막지 막내 도적떼

 22. 무지막지 막내 도적떼


 여름 시골에서는 심심할 틈이 별로 없다. 아침에 일어나 밥숟가락 놓고 나면 바로 마을로 쏟아져 나간다. 지금처럼 피시방도 놀이터도 없었지만 마당 안에 돼지우리가 있고 닭장이 있으며 대문을 나서면 논이 있고 야트막한 뒷산이 있다. 논가에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무궁화나무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나무를 뒤지면 풍뎅이가 나온다. 아이들은 이 풍뎅이를 잡아 다리를 끊고 머리를 몇 바퀴 비틀고는 바닥에 뒤집어놓는다. 그러면 풍뎅이는 숨 가쁘게 날갯짓을 하고 그 바람으로 바닥을 뱅뱅 돈다. 이 죽음의 절규 앞에서 ‘앞마당을 쓸어라, 뒷마당을 쓸어라.’ 윙, 하는 날개소리에 맞춰 뭐 이런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이르게 나온 잠자리들 또한 고초를 치른다. 죄가 있다면 잠자리채를 피하지 못한 죄이다. 무참히 분해를 당해 죽음에 이르지 않은 잠자리는 꼬리에 돌을 매달고 자신이 어느 무게까지 싣고 날 수 있는지 운송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군용 헬기가 차량들을 달고 나르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한 잠자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힘겹게 날아 도망간 잠자리는 한철 평생을 실에 묶인 작은 돌을 이끌고 마감했을 것이다.


  방아깨비들 또한 그 여름의 비극 한가운데 있었다. 이 곤충은 뒷다리를 잡고 있으면 까닥까닥 방아를 찧는 듯한 운동을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 순한 곤충을 보는 도적떼는 귀여운 방아질에 만족하지 않았다. 낚시 바늘에 방아깨비를 꿰어 논물에 대고 위아래로 흔들면 개구리가 뛰어올라 방아깨비로 위장한 바늘을 물었다. 이렇게 잡은 개구리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닭장으로 직송되었다. 외할머니가 개구리는 닭에게 보약 같은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닭장에 산 개구리들을 던져주면 닭이 뛰고 개구리가 뛰고 그 외의 것들이 많이 뛰고 또 튀었다. 이 장면을 보고 말았다. 기억에 남는 충격적인 장면들은 더 있다.     


 한 철 그 많은 도적떼를 먹이려면 곳간의 한 구석은 헐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예외 없이 닭도 많이 죽어나갔다. 이 식량 수급의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닭 잡는 장면을 많이 보아야 했다. 우리 눈에 익은 머리와 발, 내장이 없는 알몸의 닭을 만들려면 먼저 목숨을 끊어야 한다. 이 순간을 지켜보는 어린 나이들은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한다. 외할머니는 닭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 자세히 묘사하지 않겠다. 그리고 부엌칼로 한방에 머리를 치는데, 한 번은 채 죽지 못한 닭이 머리 없는 상태로 마당을 뛰어다녔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한참을 뛰어다녔다.     

 이백 근이 넘는 돼지를 잡는 장면도 보았다. 이것도 묘사하지 않을 작정이다. 다만 항상 우리 바깥을 동경하던 돼지가 장정 넷이 꼬리를 잡고 끌어내는데도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던 장면과 현실에서 보는 ‘돼지 멱따는 소리’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안 봐도 될 장면들이지만 높은 마루 위에 서서 전 과정을 보고야 말았다.      

 도적떼의 일원이었던 나는 그렇게 스러져간 생명들에게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얼마 전까지). 상황이 된다고 해도 이제는 엄두도 못 낼 짓이다. 이 순간 사촌동생이 등장한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이 친구는 나보다 수백 배는 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 분야에서 단연 발군인 실력자였다.     

 그 친구가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다. 손가락 딱밤으로 시작해서 딱지치기하듯 전력으로 바닥에 패대기치거나 축구 킥까지, 가능한 창의성을 모두 발휘했다. 그는 도적떼 중 나이는 가장 어린 축에 들었지만 어지간한 개구쟁이들은 근처에 가지도 못할 정도로 강력했다.


 외할아버지는 이 손주를 장군감이라고 예뻐했다. 그러나 장군을 예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어릴 적 우리 집에 오기라도 하면 집안은 반 쑥대밭을 각오해야 했다. 어른들에게 인사라고는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뛰어 들어가 형들 방이건 안방 다락이건 자기 방처럼 뒤지기 시작했다. 외갓집 안방 다락처럼 다디단 먹을거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 친구는 막무가내로 집안 구석구석을 쑤셨다.     


 좀 더 성장한 그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소문은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가끔 명절 식사자리에서 무용담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체구만큼 부풀린 뻥이라고 생각했다. 내 친동생들이 보낸 그 시절만으로도 버겁기에 알고 싶지 않은 역사였다. 다만 사촌 간일지언정 내가 그보다 어린 동생으로 태어나지 않은 일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그보다 더 어린 동생들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장해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와는 아무 관계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무 관계없을 것이다.


 지금은 시원한 이마를 자랑하며, 190센티에 달하는 신장에 체중 100킬로에 이르는 거구의 아저씨이자 세 아들의 아빠로 잘 살고 있다. 아마도 그 아들 중 그와 같은 아이가 최소 한 명은 나오지 않을까 추측해보는 일은 나름 합리적이다.     


 여름에 관한 글의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여름휴가를 얘기해야 한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 여름휴가의 한토막이다. 형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일 것이었으니 나는 일곱 또는 여덟 살이었다. 한여름 아버지는 대식구를 이끌고 강릉으로 휴가를 떠났다. 어느 초저녁,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탔다. 얼마나 어렵게 열차편를 구했는지, 짐이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 여섯 식구에 막내 이모도 같이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오른 열차칸은 승객석이 아니라 화물칸이었다. 우리는 화물칸에 쌓인 화물 위에 앉거나 누웠고 그렇게 기차는 10시간 가까이 느릿느릿 달렸다. 그 밤, 그 화물칸 천정 구석에는 굵은 철사로 감싼 노란 알전구가 하나 있었다. 철사에는 낡은 거미줄 한 장이 매달려 기차의 몸짓에 따라 살짝 흔들렸고 그 사이사이 날벌레 몇 마리가 붙어있었다. 정말 길고 긴 그 밤, 그 날벌레를 세고 또 셌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못할 일. 친절했던 민박집주인은 우리 식구에게 원앙금침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물을 갈아먹어서인지, 어느 밤 형은 그 번쩍이는 이불에 시원하게 오줌을 싸고 말았다. 지금도 헤아리기 어려운 그 민망함은 엄마 아버지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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