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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May 14. 2021

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23

먹고사는일

 24. 먹고 사는 일


 사는 일이라고 말할 때 꼭 붙는 수식어가 있다. ‘먹는다’라는 동사이다. 먹어야 산다는, 인간뿐 아니라 생명 있는 것들 모두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전제조건을 말하는 일이기도 하면서, 먹는 일이야말로 사는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발견이기도 하다. 그만큼 먹는 일은 중요하지만 먹는 일 하나 해결하는 것이 그지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강조로도 볼 수 있다. 


 한 시절 우리는 먹는 일과 싸워야 했다. 싸워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지금도 먹는 일을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먹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슬프고 힘든 것들이 많다. 우리에게도 그런 이야기들은 많다.     

 언젠가 아버지는 자신의 학력에 대해 이리농고를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때는 한국전쟁 중이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농사일은 하나도 모르세요?”

 참 버릇은 없는 아들이다.

 전쟁 후 한동안은 자전거를 타고 군산에 가서 생선을 떼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도 했다. 김제에서 군산이면 왕복 60km가 넘는 거리이다. 냉장시설도 없던 시절이라 생물 생선보다는 반건조 생선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해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꼬득꼬득한 박대를 좋아하셨다.


 1980년대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식당을 운영했다. 종로 3가 세운상가 건물 바로 옆 골목이었다.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고 가게들은 벌집처럼 붙어있었다. 주로 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와서 점심과 저녁 먹었고 아주머니들은 쟁반 위에 밥과 반찬을 쌓고 골목골목으로, 세운상가 계단 위로 배달을 갔고, 빈 그릇을 모아 왔다. 밥을 먹고 나면 조그만 수첩에 서명을 했다. 일주일인지, 한 달인지, 주기적으로 수금을 다녔다. 사람들은 좋기도 하고 어느 순간 고성이 오가며 거칠어지기도 했다. 아저씨들은 종종 앉아 길게 술을 마시기도 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2년 정도로 기억되는 그 시절 동안이 엄마와 아버지가 가장 많이 다투었던 때라고 기억한다.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힘들어 다투고, 가게일로 다투고, 얽히고설킨 사람일로 다투었다.     


 나는 중학생, 동생들은 초등학생이었다. 그 시절은 낮에 엄마가 집에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나가 놀기도 했고 작정하고 버스를 타기도 했다. 엄마 아버지가 일하는 식당에 가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53번이나 157번 버스를 타고 청량리를 지나면 나는 슬슬 멀미가 올라오기 시작하고 동대문을 지나면 눈이 풀린다. 그래서 아마 종로 5가쯤에서 많이 내렸던 것 같다. 셋이 걸어 골목을 헤매다 슬쩍 눈치를 보며 식당에 들어간다. 물론 바쁜 점심시간은 피해야 한다.


 맵고 짠 육개장 세 그릇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제 얼마간의 용돈을 손에 쥐고 구경을 나서는 시간이다. 당시 세운상가는 정말 별천지였다.     

 상가는 3층 높이에 긴 마당이 종로에서 청계천, 을지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테라스에 올라서면 제일 먼저 약간 무서운 아저씨들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좋은 거 있어, 인마. 싸게 줄게.”

 당시 아저씨들은 남자들을 상대로 포르노 잡지를 팔았다. 물론 나도 흥미야 있었지만 살 돈도 상대할 배짱도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분야는 라디오와 같이 전자부품을 모아 조립하는 키트들이었다. 그곳은 종류도 많았지만 가격도 비교할 수 없이 쌌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세운상가에 빽판을 사러 나가고는 했다. LP 레코드 정품이 2,500원 정도 하던 때 빽판은 1,000원에 두어 장을 사기도 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외국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 음반은 물론, 심의에 걸려 수입이 안 되는 음반까지 빽판이라는 장르는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조잡하게 인쇄된 흑백 표지 또한 그 장르 안에 포함된다.     


 지금의 이모부도 그때 세운상가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인사를 하러 가기는 했지만 이모부는 좀 무뚝뚝한 성격이라 살가운 기억은 별로 없다. 하나 의문스러운 점은 있었다. 이모부는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적잖이 손을 떨었다. 그런데 그 손으로 작은 손목시계를 열고 더 작은 부품들을 빼고 넣으며 수리를 하는 모습은 자못 신기하기까지 했다. 아마 이 또한 먹고 사는 일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달리 보면 먹는 일은 비교적 평등한 일이기도 하다. 일단 먹는 자리에 앉을 수만 있다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먹는 양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더 먹는다. 위안이 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좀 많이 먹는다. 물론 부자는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싸다고 반드시 좋은 음식은 아니다. 그리고 일단 배만 부르면 비싼 음식이라도 정중하게 거절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다음 끼니를 위해 포장할 방도를 찾아보기는 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짜장면을 시켜주면 앉아있지 못하고 대문 밖에 나가 기다리던 간절함이 남아있어서인지 우리 집은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도 다른 일에 조금 부족함이 있을지언정 먹는 일에 부족함은 용서하지 않는다. 부족함이란 기본적으로 양이 부족하면 안 된다는 기준이다. 누가 봐도 가난한 집안이다.


 명절이나 제사를 빌미로 형제들이 모이는 경우에도 가장 큰 관심사는 음식이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 음식에 대해 논의를 한다. 점심 설거지가 끝나기도 전에 저녁상에 올릴 안주의 종류를 주제로 언성을 높인다.

 두 동생은 음식도 제법 하기에 조리를 남에게 맡기지도 않는다. 시장에서 직접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음식을 만들어 서로 싸우면서 요란하게 먹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이 뭐가 있을까. 바로 이런 것이다. 먹고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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