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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Aug 01. 2021

잃어버린 시

어느 날 잃어버렸다     


나의 노트,

나의 모든 시가 적혀 있는     


그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를 제목 삼아 쓴 시

눈처럼 나리던 꽃잎 틈을 헤집고 산책하다 떠오른 시

삶에 지친 친구의 푸념을 듣고 끄적인 시

과거가 되어버린 추억의 그림자를 빛으로 감싼 시

식고 변해버린 나의 자책을 눈물로 욱여넣은 시

권태와 지루의 위기 속 피어난 몽상으로 채색한 시     


흘러간 순간의 언어들을

정성스레 빚어 고이 담아놓았던

나의 보물, 나의 자취, 나의 자욱     


가뭄을 맞은 농부처럼

그림이 불타버린 화가처럼

제목을 빼앗긴 작가처럼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아이처럼     


회색빛 스케치 속

이름 모를 인물3으로

죽은 듯 멈춘 동공에 숨이 빨릴 듯할 무렵,


시원히 바람 지나가는 거실

산뜻한 예가체프 커피 한 모금

삶을 나누는 가족들의 수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다가오는 약속

어디서 받았는지 모를 빈 노트 몇 권     


이 모든 것에 숨 쉬는

날빛의 시어, 심상, 운율, 행과 연

여전히 남아있었나 보다

실은 잃어버리지 않았나 보다     


나의 노트,

나의 첫 행이 새로이 적힐     


"어느 날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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