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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Jul 29. 2021

자존감의 가치 그리고 역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감’의 준말이니만큼,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감정 혹은 마음을 일컫는다. 하지만 단어가 표면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존중의 범위(나 자신)가 이것의 실질적인 의미나 가치를 담기에는 현저히 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존감은 관계와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의 결과가 아니란 점에서 자존심과 구별되곤 하는 자존감은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감정이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일수록 내가 나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가 사랑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게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내 자식이라서, 내 부모라서, 내 가족이라서 그들을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면, 내가 나라서 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순전히 허황된 말은 아니란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쉽게 날아가지 않는 묵직한 무게추를 안에 품은 것처럼 중심이 잘 잡혀 있다. 마치 오랜 시간 꾸준히 운동한 사람들의 몸이 탄력 있는 근질(筋質)을 지닌 것과 같이, 자존감 높은 이들의 마음엔 존재 자체를 안정시키는 거대한 중력이 자리하고 있다. 자존감은 말과 행동 등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는데, 이렇게 타인을 향해 외화(外化)되는 자존감의 형태가 관계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우리는 여유와 포용력을 갖지 못한다. 나의 중심을 다치게 하고 나를 흔들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을수록 우리는 더 다양한 것을 품지 못한 채 속 좁고 깐깐한 사람이 되곤 한다. 상대의 사소한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쉽게 기분이 상하고 분노하는 것 역시 낮고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그렇다고 해서 ‘화내는 당신이 문제야’라는 항변이 도덕적으로 즉각 수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거나 목격한 수많은 양상의 갈등들을 떠올려보자. 만약 그 갈등의 당사자들 각자가 더 높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었다면 어땠을까.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더 안정되어 더 강하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더 많은 여유를 가지고, 상대의 다름에 대해 ‘어차피 이 사람의 다름이 나를 해칠 수는 없어’라며 더 넓은 이해와 포용의 틀을 구축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를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겉만 번지르르한 낡은 유언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개개인의 낮고 억압되고 뒤틀린 자존감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인간사에 끼친 영향은 상식선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막대할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가치와 필요성 때문에라도 우린 자존감을 더 키워나가야만 한다, 라며 건설적인 끝을 맺고 싶지만 실은 그것도 녹록지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존감은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인데,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라는 건 우스꽝스럽게도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이라는 근거의 유일성을 깨뜨림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존감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글의 전개가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던 역설이자 아포리아(aporia)다. 자존감의 본래적 의미를 생각했을 때,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나를 사랑하는 것에 부가적인 여러 조건이나 이유를 덧붙이는 왜곡 행위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유든지 막론하고 높은 자존감을 ‘이미’ 가지고 있었어야 한다는 답으로 귀결된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각종 논리와 근거의 침략을 당해 일부 변형된 모습의 자존감을 키우는 것 정도가 우리에게 남은 현실적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비하의 늪에 빠져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이 씁쓸한 타협이라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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