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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Aug 04. 2021

노인과 바다: 빌어먹을 세계에 산다는 것

 내가 한 번쯤 읽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를 왜 나는 여태 읽지 않다가 내 인생에서 제법 다사다난한 시기라고 느껴지는 2021년 여름에 읽게 되었을까. "나도 물론 읽어봤지!"라며 언젠가 아는 척하고 싶은 일종의 지적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런 허영심을 자극하는 고전 명작들이야 정복 의욕을 잃게 할 정도로 수효가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중에서 하필 이 작품에 손이 간 것은 지금이야말로 내가 이 소설을 감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필연의 허용이 아닐까 하는 습관성 망상이 머릿속 한 편에 슬며시 피어오른다.




 초반부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노인과 소년의 관계성이다. 소년을 향한 노인의 “같은 어부끼리 말이다.”라는 한 마디에서 압축적으로 느껴지는 이들 관계의 뿌리는 진정한 상호 존중 그리고 우정이다. 나이로 으스대는 사람들이 아무리 한국보다 적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손자뻘(더 큰 차이일지도 모른다.) 정도 되는 사람을 이토록 수평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분명히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다. 누군가를 보며 ‘본받고 싶다’란 생각이 드는 게 절대 흔한 일이 아니건만,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노인의 인성에 대해선 거부할 도리 없이 그런 마음을 품게 된다.


 노인은 소년과의 인사 후 본격적으로 바다에 나가 물고기와의 사투를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 노인은 도입부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한 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바로 ‘근성’인데, 노인이 한 척의 배 안에서 보여주는 힘, 의지, 끈기, 집념, 투지, 집중력, 정신력 등의 총체가 지닌 강도(强度)는 결코 한 단어 안에 담기지 않을 만큼 경이롭고 막대하다. 생(生)의 끝자락을 걷고 있는 존재의 고독하고도 맹렬한 투쟁이란 고기잡이 혹은 낚시라는 일상어로 축약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로 숭고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쯤이면 성공하고 새로운 전개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시기가 한참을 지나서도 노인과 그 물고기의 싸움은 좀체 끝이 나질 않는다. ‘정말로 물고기 한 마리와 싸우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할 정도로 그들의 대결은 길고 지난하다. 다 읽은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중간에 몇 번이고 떠올랐던 저 의문에 대한 답은 정말 ‘그렇다’이다. 그래서 지독하리만큼 사투를 벌이는 노인을 보며 처음엔 위와 같이 감탄과 존경을 느꼈지만, 결국엔 끝내 지루함에 빠지고야 말았다. 책장을 넘기는 데에 점점 큰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주인공이 작품이 전개되는 내내 이 한 싸움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결국은 승리하고 해피엔딩을 맞겠지 하는 심드렁한 예측마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미 다 안다는 듯 계속 읽어나가던 차, 어느 순간부터 심상치 않게 흘러가던 소설의 끝에서 노인이 맞은 결과는 놀랍게도 실패였다.


 끝까지 포기 않고 싸웠던 노인은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온다. 건방진 예측에서 깨어나 다시 집중하고 있던 독자에게 노인은 마지막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는데, 그것은 바로 실패를 향한 노인의 놀랍도록 덤덤한 태도였다. 그는 말 그대로 피와 살을 내주는 각고의 노력을 쏟아부어 놓고도 패배했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 혹은 허무에 빠진 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라는 짧은 자평(自評)으로 금세 현실을 받아들인다. 울어야 할 당사자가 울지 않으니, 결국 우는 건 나였다. 나는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현재 시점에서) 순수하게 텍스트를 읽다가 펑펑 울고야 말았는데,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갑작스러운 눈물이었다. 한창 지루하게 읽던 때는 물론이요, 눈물이 흐르기 10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작품을 읽다가 내가 울음을 터뜨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눈물샘을 건드린 가장 큰 요인은 노인의 실패 자체보다도 그것을 향한 노인 본인의 자연스러운 수용이었다.




 노인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소년과 진정한 친구로 지내는 ‘좋은’ 사람이자, 누가 보더라도 그 이상은 절대 못 했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한’ 사람이다. 이토록 확실한 도덕적 자격을 갖췄음에도 노인은 졌고, 그럼에도 그는 금세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히 존경스러운 이 덤덤함은 분명히 무수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실패를 처음 마주한 이는 소리 내어 아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의 역사를 겪고 듣고 봐 왔을까. 그리고 그런 역사를 안겨주는 세계라는 것은 얼마나 끔찍이도 무심(無心)한가. 울지 않는 노인의 태도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무게를 그 어떤 격언보다도 통렬히 체감케 한다. 바로 이 뼈저리는 생(生)의 울림이야말로 내 갑작스런 울음을 유발한 장본(張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독한 현실성의 결말 속에서도 「노인과 바다」는 한 줄의 낭만적 여운을 남기며 끝맺는데, 그것은 끝끝내 인간이 놓을 수 없고 놓아서도 안 되는, 각자가 마음 깊이 품은 그 무언가에 대한 문장이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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