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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Aug 29. 2021

나는 왜 철학을 좋아하는가

 나는 뛰어난 사람이길 바랐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이든 엄청 못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잘 하지도 못했다. 나의 학업능력은 늘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한 번의 시험을 치르고 올 때마다 "더 잘하지 그랬니."라는 타박이 항상 뒤따랐다. 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이것도 충분히 잘한 거잖아요."라며 습관처럼 반박했지만, 사실 그 반박은 스스로에게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부모님의 엄격한 시선에 젖어들었고, 나 자신에게 ‘못했다’ 혹은 ‘못났다’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학교에선 매번 대학의 서열이 거론되었고,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의 서열이 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수준의 ‘좋은 대학’을 가기란 내게 너무나 까마득해 보였다. 나는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고, 그 뒤엔 ‘적당한’ 직업을 얻었다(물론 기준에 따라서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도, 직업을 얻었을 때에도 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더 잘하지 그랬니."라는 소릴 들었고, 만족해하는 척하면서 나 자신도 나에게 그런 소릴 지껄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에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 되어버렸고, 이상하게도 그런 나의 애정과 관심을 대신 끌어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철학이었다.




 난 10대 때부터 철학을 좋아해 왔고, 철학이나 철학자와 관련된 글이나 책을 종종 읽었으며, 고등학교 과목 중에서도 특히 윤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식(?) 철학 서적들은 차마 도전조차 하지 못했지만, 쉽게 풀어 설명해 준 책들이나마 읽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시절에 형성된 내 취향은 이제 취미가 되어, 지금도 종종 철학 강의 등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철학을 좋아하는 걸까. 철학은 사실 너무나 어려운 학문이고, 이것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깊게 파 들어가기엔 내 지적인 능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익히 잘 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아등바등하며 철학의 그림자라도 잡고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여전히 뛰어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기준은 너무나 높고 까다로워, 도저히 내가 대단하다고 인정받을 수가 없다(나의 이러한 규정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그래서 깊은 무의식 속의 나는 하나의 방편적인 전략을 세운 듯하다.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지평에서라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좋은 직업도 얻지 못하고 잘난 외모를 갖추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것들의 세계를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의 탁월함을 갖추자.’ 사회의 폭력적 시선의 영향에서 벗어나, 재력이나 학력 등이 아닌 전혀 새로운 질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서 나의 무의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지목한 게 바로 철학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이것은 사실 현실적 능력들을 갖추기 힘들다는 것으로부터의 비겁한 술수이자 철학사상이라는 멋들어진 지식이라도 쌓아 잘난 놈이 되어보겠다는 뒤틀린 허영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술수이자 허영심을 만들어 낸 바탕은 무엇인가. 그 바탕은 바로 하나의 욕구, 내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싶다는, 그 자기애와 생(生)의 욕구이다. 뛰어난 존재가 되려는 것은 실은 소중한 존재가 되려는 것이며,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타당한 근거의 일환으로서 뛰어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저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야 하건만, 슬프게도 나는 그 이상의 근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학벌, 소득, 능력, 외모 등에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 “괜찮아.”, “충분히 잘했어.”, “그만하면 됐어.”, “너 잘한 거야.”라는 말들을 내가 들어도 되는 존재라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을 늘 믿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것들이 나만의 헛된 정신승리이자 망상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사회적 위계화의 수많은 장(場)들 안에서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 할지라도 측정 불가능하고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보다 강력하고 단단하고 지혜로운 근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나 자신을(더 나아가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를 꿈꿔왔다. 결국 나는 자기애를 갖지 못하게 방해하며 온몸에 박혀있는 못들을 죄다 뽑아내고 스스로를 마침내 사랑하게 되길 바라며, 그 탈(脫)세속적인 파괴와 해방의 힘을 얻고 기르기 위해 철학이라는 사유의 숲을 헤치고 다녔던 것이다.




 나는 취미의 목록에 철학을 꽤 오랫동안 넣어놓고 살아온 사람이고,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며 살았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내가 왜 철학을 좋아하지?’라는 일차적인 질문에 대해 여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어렴풋하게 그 실마리를 잡아낸 시점에서 짐작해보자면, 나는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고 그것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것이 사실 두렵고 무서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기저에 깔려있던 것들이 현명함이나 통찰력같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열등감과 허영심 같은 부끄러운 것들이라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편해 마지않던 뿌리의 실체가 스스로의 의식에 의해 비로소 포착되었다는 사실은 제법 씁쓸하면서도 후련한 만족감을 준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철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의 철학이란 사랑과 긍정을 좇으면서도 타당한 논리를 필요로 하는 낭만적 합리주의자의 여정이다. 이것이 내가 철학하는 나에게 제시하는 생애 첫 번째의 답이자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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