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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May 01. 2022

잠재성을 믿는다는 것

보이지 않는 고귀함

 일상에서 ‘잠재성’이란 단어가 사용될 때, 이것은 암묵적으로 ‘실현될 기미가 충분히 보이는’ 잠재성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린 건실한 청소년에게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고 말할 때, 또는 큰 발전 가능성을 보이는 기업이 곧 대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 예측할 때 잠재성이란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 윤곽이 희미하거나 보이지 않아, 곧 실현될 거란 추측을 하기 힘든 상황에선 이 단어가 쉽게 쓰이지 않는다(혹은 진심이 빠진 채 형식적으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곧 현재의 영역으로 돌입할 태세가 눈에 보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이미 현재의 일부다. 현재로부터 유리(遊離)된 존재가 현재를 살아가는 이의 감각에 포착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즉, 이미 현재성으로 거듭날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잠재성이라 불리기엔 부적절하다.


 현재의 발밑을 받치며 고요하고도 세차게 약동하고 있는 흐름.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잠재성이다. 안 보이는 잠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재와 현재는 모두 실재(實在)이며, 그렇기에 잠재는 실재의 일부로서, 실재의 다른 일부인 현재의 기저에서 살아 숨 쉰다. 이것이 자연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명제라고 말할 의지나 역량이 내겐 없다. 그저 이것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나의 소박한 믿음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엄연한 현재이다. 현재는 물론 변화하고 유동적이나, 그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고정되어 있다. 하늘은 다양한 날씨를 보여주면서도 결코 땅이나 바다의 형태를 취하진 않는다. 인간이 아무리 서로 다르게 생겼다고 한들, 우리가 개와 인간을 진정으로 혼동하지는 않는다. 심각한 신체적 장애가 있더라도 인간은 인간의 생김새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구조와 제도 역시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게 아니다. 현재란 이토록, 끊임없는 변화를 거치면서도 큰 틀에서의 동일성을 쉽게 깨지 못한다.


 잠재의 세계는 다르다. 전제된 동일성 안에서 변하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변화만이 가득한 와중에, 너무 복잡해서 종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와중에, 우연히 동일성‘도’ 발생한다. 그렇게 발생해서 물결 위로 튀어 오른 동일성이 바로 현재다. 그래서 현재는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이다. 멋들어진 의미가 부여돼 조각된 게 아니라, 잠재의 장(場)에서 얽히고설키다가 우연히 묶여 탄생한 매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러므로, 무수한 가능성과 물음으로 넘쳐나는 대양 위의 섬이다. 이 땅의 밑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함이 놓여 있다. 그것의 본질은 그저 ‘본질 없음’이므로, 태양보다 육중하다가도 빗물보다 가볍다. 이 마법 같은 잠재성이 현재를 늘 지탱하며, 현재의 영원한 뿌리로서, 감히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현재와 교류한다. 그래서 현재는 신비롭고 가능적(可能的)인 것이다.


 모든 세계관이 그렇듯, 잠재성에 기반한 이 세계관 역시 인간관과 이어진다.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은 충만한 잠재성과 규정 불가능성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더 나아가 세계 내의 만물은)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치관이 ‘누가 언제 어떻게 성공할지 모르니, 모든 사람을 잘 대해야 한다’라는 식으로는 결코 정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가치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그가 소위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느냐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진정한 잠재성의 차원을 향한 믿음에 입각한다면, 인간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죽는 이조차 가치 있다.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해서 귀한 씨앗이 아니었던 게 아니다. 실현되는 잠재성은 그 자체로 현재를 수놓는 새 생명으로서 빛나고, 실현되지 않는 잠재성은 현재를 정립(正立)시키는 심층이자 정초(定礎)로서 고귀하다.


 물론 이와 같이 아름다운 낙관에 젖어 있다가도, 잠재성의 차원이 그야말로 잠재성이기에 품고 있는 어둠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다. 천진한 희망과 긍정으로 넘실대는 바다에는 동시에 언제 끓어 넘칠지 모르는 절망과 부정이 녹아 있다. 무한한 잠재성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의 가능성 속에 파탄과 멸망이 웃고 있다는 의미이자 인간의 규정 불가능성 속에 악마가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잠재적 장(場)에 대한 믿음은 웃음과 희망을 좇게 하다가도 별안간 닥쳐오는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은 그 고통에서 또다시 웃게 하는 것도 오직 잠재성의 힘이다.

 ‘잠재성’이라는 단어에 특정한 방향성이나 가치 기준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한 논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잠재를 믿는다는 것은 굽힐 줄 모르는 긍정으로 나아가는 길일 수도, 끝 모를 부정으로 파고 들어가는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자와 후자 사이를 헤매며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다. 전자를 지향(志向)의 대상으로, 그리고 후자를 인지(認知)의 대상으로 삼는 것. 이것이 가치관을 가치관답게 만드는 최선의 방식이자,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유의미한 균형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무한함을 믿는다는 건 결국, 무의미하고 우발적으로 탄생한 세계의 밑바탕을 눈부시게 칠하는 붓놀림이다. 이것은 위계와 구조가 존재적 가치를 규정짓는 현실에 대한 파괴적 공상이자, 생(生)과 다(多)의 세계를 향한 창조적 신념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잠재성은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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