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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Sep 12. 2022

무한한 비교가 낳는 평등

 평등이란 개념은 흔히 서열 혹은 위계와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야말로 모두 공평하고 동등하다는 의미이므로, 여러 존재자들을 수직으로 줄 세워서 우위와 열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평등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을 냉혹하게 비교 평가하는 세속적 잣대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모두 평등해!’라고 소리치며 남들의 불쾌한 평가 행위에 되레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서열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며 호소하는 평등은 결국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일 뿐’이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학벌, 외모, 재력과 같은 기준들은 분명 우리의 눈앞에 현존하고 있으며 그에 의해 우리는 비교당하고, 또 같은 논리로 남들을 비교한다. 평등을 주장하는 당사자조차 결코 ‘등수 매기기’라는 일상적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눈에도 분명, 더 똑똑한 사람, 더 예쁜 사람, 더 부유한 사람은 보인다. 사람들 사이의 ‘더’와 ‘덜’이 늘 체감되는 사회에서, ‘우린 다 같아’라는 주장은 근거가 매우 박약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며, 그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 분명한 ‘잘남’과 ‘못남’이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직관이 지적하는 진실이다.




 따라서 평등이란 결코 비교와 서열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측정 불가능한 정도로 무수히 많은 종류의 서열화를 긍정하는 데에서 성립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더 잘나고 더 못난 순위를 정하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이 제시하는 경우의 수이다. 앞서 말한 학벌, 외모, 재력이 그 경우의 전부라면, 이 논리는 지극한 불평등에서 끝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수는 무한대이고, 학벌과 외모 및 재력의 기준에서 열등한 사람을 보다 우등하게 만들어 줄 기준은 끝없이 많다.


 공부를 더 잘하는 사람과 이목구비가 더 잘생긴 사람이 있듯, 더 성실한 사람이 있고, 더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사람이 있고, 고통을 더 잘 견디는 사람이 있고, 더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고, 더 깊은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평등이 성립할 수 있게 하는 정초는 바로, 이 다양한 위계의 존재에 있다.



 우열을 매기는 것이 단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부당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합당하게 우열을 매길 수 있는 길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서부터 평등은 피어난다. 비교될 수 있는 기준이 무수히 많기에, 그 기준들의 대상이 되는 수많은 요소들의 총체인 인간 자체에 있어서, 인간 A와 B 중 누가 더 우월한 인간인지를 우리는 판정할 수 없다. 비교 판단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단정적 거부가 아닌, 그 가능성을 무한한 차원의 범위로 긍정하는, 그에 따른 최종적 우열 판정의 무기한 유예 혹은 불가능 선언. 바로 이 지점에서 평등이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평등의 가치관을 정당화하는 것은 우리 사이의 같음이 아닌 다름이다. 지극히 다양한 종류의 무수한 다름이 낳는 무수한 위계들이 바로 우리의 평등을 낳는다. 우린 서로 같아서 평등하다고 ‘확정(確定)’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서열화의 요인들이 끝없이 많아서 확실한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그러므로 평등하다고 ‘가정(假定)’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발 디딘 채 호소할 수 있는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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