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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Aug 17. 2023

차명상

느린 생각

고교 시절 자주 찾던 절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1시간을 걸어서 가야 하는 절이었는데 비포장도로를 먼지 뒤집어쓰면서도 주말마다 갔었습니다. 

그땐 주말마다 비가 내렸던 기억이고 늦은 봄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비가 내렸고 우린 우산을 쓰고 걸어서 절엘 갔습니다. 항상 우리를 단골로 맞아 주던 젊은 스님이 그날은 다도를 알려주시겠다며 발이 길게 늘어진 선방으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스님은 다도 상을 차리고 앉는 자세부터 감상하는 것, 마무리하는 것을 보여 주셨는데, 아무 설명도 없이 몸짓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한 모금 마시고 지긋이 찻잔을 내려다보셨고, 두 모금 마시고는 찻상 끄트머리쯤 보셨고, 세 모금 째 마시고는 대나무 발이 늘어진, 비 내리는 문밖으로 시선을 멀찍이 보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다도란 지긋함이 들어 있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차를 ‘탄다’라고 하지 않고 왜? ‘우리다’라고 할까…….


혼자 뜬금없이 궁금해하다가 생각합니다.

‘탄다’라고 하면 왠지 바쁜 일상 속의 연속인 것 같고, ‘우린다’라고 하면 ‘지긋함’의 공간에서 ‘기다림’이 함께 내려와 드넓은 공간에 오직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과 몸을 부풀리며 회귀하듯 파릇해지는 찻잎에 동요되어 나도 회귀에 가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천천히’는 지혜입니다. 시간을 거룩하게 보내는 일입니다. 간절함이 스며있습니다. 삶을 깊이 있게 사는 일입니다.     

오늘은 “녹차 타 줄까요?” 하지 말고

“녹차 우려 드릴까요?”라고 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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