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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Sep 20. 2023

소리의 몸

거식증이 가져 준 선물

고요함을 원했으나 소리들이 몰려옵니다.

낮에는 없던 소리들이 밤이 되어 제 몸집을 드러냅니다.

냉장고가 소리, 에어컨 소리, 가끔 씩 행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 누군가 계단 오르는 소리,

소리, 소리들...

숨어있던 소리의 몸들이 밤을 이기고 제 몸을 드러냅니다.     

 

자연의 소리를 찾는다는 것은 감성가 들이나 하는 ‘짓’ 인양되어버린 것 같아 매우 쓸쓸합니다.

이젠 더 이상 달밤에 진돗개가 짖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닭울음소리에 잠을 깨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늦은 저녁 번갈아가며 울어대던 개구리 두꺼비 맹꽁이 소리는 잊은 지 오랩니다. 소리가 소리를 잡아먹은 이 시대에 외로운 시인은 소리에 잠을 설칩니다.     

밤의 소리. J.

소리의 추억을 생각합니다. 소리는 냄새를 동반합니다. 소리는 추억이지만 냄새는 향수입니다. 소리는 객관적이지만 향수는 주관적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소리에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향수, 추억. 그 냄새.     


나는 오래전 8월의 가을냄새를 잊지 못합니다. 그날도 비와 바람 소리와 함께 가을냄새가 내게 왔습니다. 작은 문학모임을 마치고 각자 헤어져 가는 길, 인사동 골목엔 아직 여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경인미술관을 끼고돌아 공용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향해 걷는 중 자정을 맞았고 그때 갑자기 훅--- 하고 가을바람이 한 덩어리 가슴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마치 어제와 오늘을 싹둑 갈라놓은 듯, 자정을 기준으로 전날과 그날의 계절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준비 없이 가을을 맞았고, 덕분인지 때문인지 그해가 다 가도록 거식증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거식증이 오고부터 소리에 민감해졌습니다.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보다 없는 소리에 민감해져 힘들었습니다.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소리들이 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음은 안 들리고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거식증이 온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보다 소리에 더 마음이 가 닿아 음식을 못 먹어도 사실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이면 작업실 발코니창으로 가만히 내려오는 달빛 소리, 그 소리와 함께 검은 하늘에 펼쳐진 잔별들의 아기자기한 소리들, 새들에게 몸을 다 내어주고 재잘거리는 소리를 품은 향나무의 숨소리... 그해 가을은 얇은 바람에도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에 바람에게도 길이 있음을 알게 했습니다.    

  

이제 곧 여름이 뜨겁게 쓴 편지가 붉게 물들면 호수는 또 말없이 그 없는 소리들을 다 담아내며 품을 것입니다.


‘J. 이젠 더 이상 잠을 설치지 않기로 합니다. 소리를 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요함이 주는 그 장엄한 소리들에 마음 기울이던 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산책길에 만난 호수. J.

- 2023.09.19. 체칠리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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