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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Sep 24. 2023

우두커니

마음길을 걷는 일

초저녁에 잠을 자서 이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새벽 2시를 넘는 이 시간이 드문 일은 아닌데 밤을 넘어 꼬박 맞는 새벽과 자고 일어나 맞는 새벽이 달리 느껴집니다. 아마 끝과 시작의 차이겠지요. 습관처럼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쳐 보듯 컴퓨터 화면에 한글파일을 펼치고 우두커니 백지를 바라봅니다. 글꼬투리를 잡는 일은 늘 쉽지 않습니다. 백지를 얼마간 응시하고서야 우두커니가 내놓은 글길을 따라가다 보면 몇 자 적을 글거리가 따라붙기도 합니다.      


‘우두커니’는 마음 길을 걷는 일입니다. 생각이 많은 날은 정해지지 않은 마음길을 따라 한 없이 마음 바깥에서 걷고 걷기를 멈추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길이 멀다는 것은 생각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나는 못 다 쓴 글 앞에서 우두커니 있을 때가 많습니다. 글길을 찾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우두커니가 소극적인 태도라고 할 테지만 내게는 적극적인 태도에 가깝습니다. 적어도 마음길을 걸을 때는 말입니다. 그 길은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용기를 줄 때도 있고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의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제와 어제 드라마 ‘스타트업’을 몰아보기 했답니다. 16회로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괜찮게 보았습니다. 가난한 소년과 외로운 소녀, 그리고 천재 소년이 인연이 되어 그들이 청년이 될 때까지 이어가는 인연도 아름다웠고 창업을 두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아름다운 가능성에 대해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팀원처럼 느껴져 오랜만에 가슴 뜨거워하며 본 드라마입니다.      


언젠가 친구와 차를 타고 가며 하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친구는 만학도였고 대학을 다니니 정신이 맑아지더라며 사람이 왜 배워야 하는지 알겠다며 실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동감하며 거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지금 상태의 정신으로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이라는 주제를 놓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간다고 가정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대를 이야기합니다. 아마 성인이 되는 시점이라 그럴 테지요. 누군가 삶에 대해 정답 같은 길을 알려준다면 실수 없이 모두가 성공의 길로 들어설 텐데 준비 없이 맞는 어른의 길은 두려움과 외로움의 어느 시점으로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20대로 돌아가기는 가는데 ‘지금의 정신을 갖고’라는 전제를 붙이는 건 무리가 아니지요. 친구와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불가능한 문장 앞에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겠죠. 


드라마 ‘스타트업’에서 가난한 소년은 샤프한 청년이 되었고 외로운 소녀는 이성적인 청년이 되었으며 천재소년은 여전히 우두커니를 많이 하는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이들 셋의 각기 다른 성향이 좌충우돌하며 이루어 나가는 스타트업이 성공으로 다달을 때 나의 20대가 참 그리웠습니다. 좋아서 그리웠던 것은 아니고 아쉬움이 많아 그리웠습니다.


나의 20대는 아둔하고 모자라 부족함 투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정신을 갖고 20대로 돌아간다면 그때의 아둔함을 거두고 모자람을 채워 실수 없이 뭐든 해내지 싶은 것이지요.      

이 정도까지 마음길에 접어들면 길은 끝납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마음도 인식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을 청년처럼 살기로 합니다.


오늘에 힘을 주는 일,

우두커니가 주는 선물입니다.     

        

- 2023.09.23. 체칠리아정     

드라마 스타트업 캡처.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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