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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Sep 21. 2023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가을 햇볕 모아 놓기

집에서 조금 벗어나 큰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대단지 아파트가 있습니다. 나는 산책을 갈 때 가끔 이 아파트를 질러가곤 합니다. 특히 가을엔 이 아파트 공터를 일부러 걷기도 합니다. 오늘도 산책길에 이곳을 들러 걸었습니다. 마침 대추 따는 날이라고 관리소장인 듯한 분과 주민들 몇몇이 나와 있는데 즐거워 보였습니다. 나는 슬쩍 기웃 거리며 대추 한 움큼을 얻었습니다. 가을 한 움큼을 얻은 것입니다. 제법 달달했습니다.

가을 한 알. J.

이곳 아파트는 어르신들이 많이 삽니다. 그렇다 보니 어릴 적 시골에서 보던 풍경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재미있는 풍경들을 만났습니다. 열심히 사진 찍는 나를 보고 의자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어르신들이 오히려 나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십니다.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1. J.

정진규 시인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라는 시에서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 참깨도 털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이 햇볕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키우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가을볕 아닐까 생각합니다.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2. J.

이곳 아파트에서는 햇볕의 부지런함을 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3. J.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4. J.

자칫 잡초들로 무성할 공지에 주민들 모두가 내 집 앞 가꾸기 운동이라도 하는 듯 단지마다 꽃밭을 만들어 산책하는 길이 심심치가 않습니다. 주민들 모두가 놀고 있는 햇볕을 잘 사용하고 있는 게지요.

놀고 있는 햇볕 사용하기 5. J.

어쩐지 걷는 동안 내 몸도 가을볕에 바삭해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가을볕을 내 몸에 모아 둬야겠다 생각합니다. 혹시나 어제처럼 비 오는 날 마음이 눅눅해 지거든 오늘 모은 햇살을 꺼내어 바짝 말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햇살은 여전히 제 몸이 아깝다고 말할 테니까요.    

  

오늘은 참 동화 같은 상상을 하며 걸었습니다. 가을 햇살 덕분입니다.


- 2023. 09. 21. 정온유. 체칠리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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