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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조 6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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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칠리아정 Oct 03. 2023

당신이 내어 준 자리

붉은 꽃 외

붉은 꽃

 - 청년 곽재우*를 생각하며      

    

/ 정온유    

      


저무는 강물이 노을에 타들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붉은 꽃 물살에 피듯,

무리지어 달려오듯.     


밤빛에 일렁이며 웅성거리는 잔물결

들춰보면 못 다 한 말 주석처럼 달려있고

피 흘린 남강 자락은

긴 서사로 달아 오른다.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겨울남강

- 솥바위나루*에서      

    

/ 정온유      


         

뒤척이는 몸 안으로 말들이 자라네

때때로 찾아오는 혹독한 후유증이

솥바위 나루에 닿아

물빛보다 더 아리고     


침묵을 키워내며 무던히 담은 풍경

봄이 되면 아픔도 녹을 것을 알지만

차디찬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솥바위 어루만지며 가만히 찰랑일 뿐

칼날에 입은 상처 하루종일 뒤척이다

새롭게 흘러온 강물,

그 물에 몸을 씻네   



                           

* 경상남도 의령군 남강에 있는 바위로 그 모양이 가마솥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곳에서 잠복을 하여 왜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푸른 소리

- 세간리 느티나무*  

        

/ 정온유        


  

허리 굽은 짐승처럼 길게 늘인 모가지

둥둥둥 북을 매던 

세간리 현고수,     


아직도 마을 어귀에 장승처럼 서 있다.   

  

간절한 붉은 해가 남강으로 떨어질 때

수피 덮은 이끼들의

그 푸른 북소리.    

 

혼백은 은유의 화살로

노을에 명중된다.



*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있는 느티나무. 현고수는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1592)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93호.     




-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     


    비바람이 몹시 부는 아침이다. 

   숨 쉬기 조차 힘들었던 무더위가 오늘 온 비바람에 한 풀 꺾였다. 이 태풍이 지나고나면 가을이 올 것이다. 

   계절은 한 철을 절실히 살다가 다음 계절이 올 때쯤 어김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난다. 그 떠난 자리에 새로운 계절이 들어서고 새로운 계절은 다시 앞 서 간 계절이 이뤄 놓은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또는 깊히 있게 성장시켜 놓고 다음 계절에게 다시 또 자리를 내어 준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기까지 그 긴 시간 속에 앞서 간 수많은 목숨들이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고 가꿔 온 이땅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내어 준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라는 것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도 잘 만들어진 자리를 다음 세대에게 내어 줘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하게 된다.      


   몇 해 전 남강을 여행하였다.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자연 뿐, 여행자인 나는 아픔보다는 즐기는 일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누군가 이미 이뤄 놓은 것을 받기만한 사람은 이루기 이해 애쓴 자들의 노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몇 달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러고나서 이유없이 많이 아팠다. 이 병은 여행이 여행만이 아니기를 바라며 여행지에서 만나야했던 목숨들을 끄집어내어 한 편 한 편 시 속에 넣고 나서야 내 몸에서 나갔다. 마치 내 삶의 빚을 한 꺼풀 갚아 낸 것처럼.    

 

   결실은 노력의 성과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누군가의 노력을 알아챌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한다. 그것 또한 빚을 갚는 일일 것이다.     


   비바람이 그치질 않고 있다. 여름이 내어 준 자리가 혹독하다.




- 2023년 《나래시조》가을호 초대석

묵상.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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