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 외
붉은 꽃
- 청년 곽재우*를 생각하며
/ 정온유
저무는 강물이 노을에 타들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붉은 꽃 물살에 피듯,
무리지어 달려오듯.
밤빛에 일렁이며 웅성거리는 잔물결
들춰보면 못 다 한 말 주석처럼 달려있고
피 흘린 남강 자락은
긴 서사로 달아 오른다.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겨울남강
- 솥바위나루*에서
/ 정온유
뒤척이는 몸 안으로 말들이 자라네
때때로 찾아오는 혹독한 후유증이
솥바위 나루에 닿아
물빛보다 더 아리고
침묵을 키워내며 무던히 담은 풍경
봄이 되면 아픔도 녹을 것을 알지만
차디찬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솥바위 어루만지며 가만히 찰랑일 뿐
칼날에 입은 상처 하루종일 뒤척이다
새롭게 흘러온 강물,
그 물에 몸을 씻네
* 경상남도 의령군 남강에 있는 바위로 그 모양이 가마솥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곳에서 잠복을 하여 왜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푸른 소리
- 세간리 느티나무*
/ 정온유
허리 굽은 짐승처럼 길게 늘인 모가지
둥둥둥 북을 매던
세간리 현고수,
아직도 마을 어귀에 장승처럼 서 있다.
간절한 붉은 해가 남강으로 떨어질 때
수피 덮은 이끼들의
그 푸른 북소리.
혼백은 은유의 화살로
노을에 명중된다.
*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있는 느티나무. 현고수는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1592) 때 곽재우 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93호.
-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
비바람이 몹시 부는 아침이다.
숨 쉬기 조차 힘들었던 무더위가 오늘 온 비바람에 한 풀 꺾였다. 이 태풍이 지나고나면 가을이 올 것이다.
계절은 한 철을 절실히 살다가 다음 계절이 올 때쯤 어김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난다. 그 떠난 자리에 새로운 계절이 들어서고 새로운 계절은 다시 앞 서 간 계절이 이뤄 놓은 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또는 깊히 있게 성장시켜 놓고 다음 계절에게 다시 또 자리를 내어 준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기까지 그 긴 시간 속에 앞서 간 수많은 목숨들이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고 가꿔 온 이땅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내어 준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빚진 자들이라는 것도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도 잘 만들어진 자리를 다음 세대에게 내어 줘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하게 된다.
몇 해 전 남강을 여행하였다.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자연 뿐, 여행자인 나는 아픔보다는 즐기는 일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누군가 이미 이뤄 놓은 것을 받기만한 사람은 이루기 이해 애쓴 자들의 노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몇 달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러고나서 이유없이 많이 아팠다. 이 병은 여행이 여행만이 아니기를 바라며 여행지에서 만나야했던 목숨들을 끄집어내어 한 편 한 편 시 속에 넣고 나서야 내 몸에서 나갔다. 마치 내 삶의 빚을 한 꺼풀 갚아 낸 것처럼.
결실은 노력의 성과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누군가의 노력을 알아챌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한다. 그것 또한 빚을 갚는 일일 것이다.
비바람이 그치질 않고 있다. 여름이 내어 준 자리가 혹독하다.
- 2023년 《나래시조》가을호 초대석
#시조
#남강
#묵상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