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점토판에 새긴 '약속' (2)

신전의 창고에서 (2)

by 이재인

제2장. 점토판에 새긴 '약속' — 신전의 창고에서 (2)



그때 그 서기관과 대화를 나눈 건 딱 한 번이었어.


어느 날 밤이었지. 창고 정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문 앞에 서 있었어. 달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젊었어. 내 얼굴에는 이미 주름이 깊었는데.

"오래 일했군요."

그가 말했어. 창고 일을 말하는 건지, 내 인생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어.

"서른 해째입니다."

"서른 해." 그가 고개를 끄덕였어. "짧지 않군요. 그동안 많이 봤겠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 뭘 봤냐고 묻는 건 위험한 질문이었거든. 신전에서 본 것을 함부로 말하면 혀가 잘릴 수 있었어.

"걱정 마세요." 그가 웃었어. 이상한 웃음이었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물었지.

"당신은 이 체제가 공정하다고 생각합니까?"

공정.

그때 난 그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어. 수메르어에는 "공정"에 해당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었거든. 신의 뜻에 맞는 것. 왕의 법에 맞는 것. 전통에 맞는 것. 하지만 그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었어.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했어.

"농부들은 땅을 잃고, 신전은 땅을 얻습니다. 농부들은 굶주리고, 신전 창고는 넘칩니다. 그게 공정한지 아닌지, 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바라봤어. 오래. 마치 내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당신은 똑똑하군요." 그가 말했어. "판단할 수 없다는 게 정답이에요. 공정함은 없으니까. 있는 건 규칙뿐이죠."

"규칙이요?"

"누가 정했는지 모르는 규칙. 왜 그런지 설명되지 않는 규칙. 그냥 그렇다고 하는 규칙." 그가 점토판을 들어 보였어. 달빛에 쐐기 문자가 반짝였지. "이게 규칙이에요. 진흙에 새겨진 것. 구워지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가 점토판을 내 손에 쥐어줬어.

"읽을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어. 창고지기에게 문자는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그게 요점이에요." 그가 말했어. "읽을 수 없는 사람은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규칙을 만들고."


그날 밤 이후로 난 글을 배우기 시작했어.

몰래. 아무도 모르게. 신전에서 버려진 깨진 점토판 조각들을 모아서. 서기관들이 연습하다 버린 것들. 거기에 새겨진 기호들을 하나씩 외웠어.

보리. 양. 기름. 은. 빚. 이자. 담보. 노예.

단어들을 배울수록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

점토판에는 숫자만 있는 게 아니었어. 삶이 있었어. 누가 얼마를 빌렸고, 언제까지 갚아야 하고, 못 갚으면 뭘 내놓아야 하는지. 한 사람의 운명이 진흙 한 조각에 담겨 있었어.


그리고 깨달았어.

점토판을 단단하게 굽는 순간, 운명도 굳어버린다는 걸.


길가가 죽었을 때 나는 그의 장례에 갔어.

신전 사람이 농부의 장례에 가는 건 드문 일이었지. 하지만 누구도 나를 막지 않았어. 창고지기일 뿐이었으니까.

그의 아들이 관 앞에 서 있었어. 열다섯 살쯤 됐을 거야. 아버지와 똑같은 갈라진 손을 하고 있었지.

"아버지가 남긴 빚이 있습니다."

신관이 말했어. 장례식장에서.

"갚으셔야 합니다."

나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어. 아니, 분노보다 더 차가운 것. 인식. 이 모든 게 설계되었다는 인식.


빚은 죽지 않았어.

사람은 죽어도 빚은 살아남았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아들에게서 손자에게로. 점토판에 새겨진 숫자들은 세대를 넘어 전해졌어.


내가 신전을 떠난 건 그로부터 10년 뒤였어.

몸이 늙어서가 아니었어. 마음이 지쳐서였어. 더 이상 창고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의 삶이 숫자로 환원되는 걸 볼 수 없었거든.

떠나는 날, 그 서기관이 또 나타났어.

여전히 서른 살로 보였어. 나는 이미 예순이 넘었는데.

"가시는군요."

"네."

"어디로요?"

"모르겠습니다. 그냥 여기가 아닌 곳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어. 마치 그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이.

"다시 만날 거예요." 그가 말했어. "당신 같은 사람은... 계속 보게 되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언젠가 알게 될 거예요."

그가 돌아섰어. 그리고 걸어가면서 중얼거렸어. 내가 들으라는 듯이.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이.

"빚은 신의 이름으로 시작됐어요. 하지만 신은 빚을 원한 적 없죠. 원한 건 언제나 인간이에요.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멈췄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록할 수 있는 인간이요."


그게 수메르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야.



그 뒤로 난 여러 곳을 떠돌았어. 우르에서, 라가시에서, 니푸르에서. 그리고 어느 날 눈을 떴더니 다른 시대였어. 다른 몸이었어. 다른 이름이었어.

하지만 점토판은 여전히 있었어.

빚도 여전히 있었어.

그 서기관도... 아니,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게.



얘야, 이게 첫 번째 이야기야.

빚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억하거라.


빚은 신의 이름으로 시작됐어. 하지만 신은 빚을 원한 적 없어.

원한 건 기록하는 자들이야.


그리고 그들은 5천 년 동안 기록을 멈춘 적이 없어.


점토판에서 파피루스로.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양피지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컴퓨터로. 컴퓨터에서 블록체인으로.

매체만 바뀌었어.

규칙은 그대로야.


읽을 수 없는 자는 따르고, 읽을 수 있는 자는 지배한다.


다음 이야기는 바빌론이야. 함무라비 법전 알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거.

그런데 말이야, 그 법전에 빚에 대한 조항이 몇 개나 있는지 알아?


282개 조항 중에 거의 50개가 빚과 이자와 담보에 관한 거야.

인류 최초의 성문법 중 1/6이 빚을 다뤘어.


우연일까?

아니지.

설계야.




(제3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