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킥은 나이를 막론하고 찾아올 수 있다.
저 학교 그만두겠습니다.(1)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퇴사(퇴직 혹은 사직) 의사를 패기있게 날린 것도 잠시, 곧이어 엄습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으니, 이직 확정 후 사표를 날리는 정석 코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덩그러니 벤치에 앉아서 내가 곧 이곳을 떠난다니!라고 막상 생각하자 기분이 오묘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교실에 있는 학생들 생각도 났다. 저녁이 되고 나는 우리 반 실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맡은 일은 깔끔하게 하시는 중년의 능력자 분이시다.) 나는 왜 이 분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그냥 하소연이 하고파서? 학생이지만 인생은 나보다 선배여서? 아니면 능력이 있으신 분이니까 담임과의 정을 끄집어내 줄이라도 내려달라고?
솔직히 말해 어느 것 하나 생각 안 해봤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나 붙잡고 내 얘기를 하고 싶었고, 우리 반 실장님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분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것 같다. 물론 학교의 부조리를 다 말할 수는 없고, 그저 내가 이곳의 일을 감당하기 힘들어서라고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실장님은 나의 사정에 공감하시면서도 절대로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정든 담임을 보내기 싫어서였다면 나도 단호했을 것이다. 허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 자신이 금융 계통에 몸담으면서 지금만큼 자금이 회전하지 않는 시기가 좀처럼 없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다른 길을 찾아놓지 않고 직장에서 나오는 것은 최악의 수라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은 버티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성급하게 사직서를 제출했나 급 후회가 들었다. 나의 모든 경력은 학교에서 이루어졌고, 학교 밖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멍청하게도 학교에서 경력을 마무리하려면 언젠가는 임용이라는 시험을 쳐야 한다는 대원칙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 학교의 업무가 부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이 자기계발을 하지 않은 나를 변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실장님과의 통화가 끝나고 교장에게 전화해서 제출한 사직서를 철회할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이다. 당연히 교장은 지금 장난하냐고 했고, 이미 채용공고가 올라갔다고도 했다. 알았으면 전화를 안 했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괜한 소리 해서 죄송하다고 끊으려는데 교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일단 내일 다시 얘기하자"
채용공고도 올렸다는데 내일 할 얘기가 뭐가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다음날이 밝았다. 교장실에 방문하여 쭈구리가 되어 있으니 교장 왈
"당신, 전화위복이라는 말 알지? 내가 당신에게 제안을 할 건데, 그것만 받아들이면 여기서 원하는 만큼 근무할 수 있게 해 줄게. 채용공고는 내리면 그만이고"
정신이 살짝 피폐해진 나에게는 나름 솔깃한 말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저기서 솔깃했던 것 자체가 이불킥 감이긴 한데... 여하튼 그 제안이 뭐냐고 물었던 나에게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오면 된다. 뭐 급한 일 있으면 자네 볼일 보러 가고,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는 거지. 이것만 당신이 오케이 하면 이 학교에 있고 싶은 만큼 일 하다가 다른 좋은 곳 찾으면 떠나라, 그땐 안 잡을게"
교장은 교회에 엄청나게 빠져있는 사람이었다. 이 학교는 매주 1회 학생들이 참여하는 예배(FM까지는 아니지만 기도는 꼭 해야 하는... 그리고 기도도 매주 학급이 돌아가며 학생 한 명씩 총대 메고 해야 한다.)가 있으며, 또 매주 1회 교직원들이 참여하는 예배(거의 FM에 가깝게 하며, 매주 교직원들이 돌아가며 대표로 기도를 읽어야 한다.)도 있다.
*내가 근무하기 몇 해 전까지는 주말에도 교직원들이 교회에 의무참석이었고, 정의로운 누군가가 민원을 넣어 악습이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다른 형태로 부활했다.
하던 XX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이 학교에서 계속 느낀 점 중에 하나는 교장이 너무 교회를 강조(보는 측면에 따라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애초부터 개신교에 호감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저런 식으로 교회를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역효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 주체는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겠지만...
심지어 일요일에 나오라는 교회는 정식 교회도 아니었다. 교장이 새로 올린 건물에 층 하나를 교회라고 이름 붙이고 그냥 운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추측컨대 이걸 운영하는 이유는 헌금... 크흡!
또한 이 학교에는 성인 학생들이 많으니 누군가는 주말마다 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정말 대단한 시스템이다.(이러라고 만든 학교인가?)
내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교장에게 답변 대신 했던 질문은 "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십니까?"였다.
그런데 여기서 교장의 답변이 나에게 꽤 큰 데미지로 들어왔다.
사실 교장은 며칠 전 다른 선생님과 교회(위에서 언급한) 운영을 도와주는 학생분들과 함께 나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대접을 잘해주시고 음식도 입맛에 맞아서 마음에 들었으며, 내가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니 그때부터 마음이 더욱 쓰였다는 것,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지금 여길 관두면? 나야 내 의지로 관둔 거지만 부모님은? 나이는 30대 중반인 아들이 직장을 갑자기 때려치우겠다는데 부모님 심정은 어쩔 거냐고... 그런데 내가 그냥 눈 딱 감고 일요일마다 교회만 나가면! 그러면 내 발로 나가기 전까지 있게 해 주겠다잖아, 무기계약직으로 승급시켜 주겠다는 거 아녀?
급여를 후려쳐서 배를 불리는 이 집단의 수장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리스크가 분명 존재하는데도, 부모님이라는 단어의 영향력은 컸다. 마침 수업이 시작되어서 나는 수업을 마친 후에 대답을 드려도 되냐고 물었으나 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답하러 안 와도 된다. 이번 일요일에 자네가 오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안 오면 원래대로 가는거고."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슴 한편이 소화가 안 된 것처럼 죄여 오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났다. 교장의 말에 의하면 일요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었지만, 나는 빨리 내 의사를 전달해야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수업이 끝나고 또 바보 같은 짓을 했다.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