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문득 창가에 있는 블라인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이 집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처음으로 그림자를 자각하다니.. 신기했다.
어릴 적 나는 자기 전 방안에 있는 모든 물체의 그림자를 신경 쓰는 아이였다. 매일 똑같이 자고 일어나는 침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를 보면서 무서운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림자를 계속 의식하고 있자면 이것이 꾸물꾸물 커지면서 괴물로 변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겨야 했다.
사실 무서운 상상은 그림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몸이 무척 아팠을 때는 우리 집 큰방 천장에서 수십 마리의 도깨비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걸 본 적이 있었고,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서는 처녀귀신이 나를 해치려고 한 적도 있었다.(꿈과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겐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진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그게 전혀 아쉽지는 않으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더 이상 그들이 내 곁에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내가 만든 허상일 뿐인 걸까. 기가 약하면 귀신이 잘 붙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때도 지금도 기가 강한 편은 아니니 전자는 아닌 듯싶다.
결국 나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다(이상하게도 천사와 요정의 존재를 믿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딱히 과학과 이성만을 믿는 사람이 아님에도 그걸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게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괴물이나 귀신 따위를 생각하기엔 밤이 너무 피곤한 어른이 되었다.
이제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시무시한 문제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얼른 잠을 자고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어쨌든 더 이상 무서운 것들을 보지 않아 다행이긴 하다. 다만 상상력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니 좀 서글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