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당근 Mar 02. 2022

고물 택시를 타고 콜롬비아로

 

 발렌시아에서 밤 버스를 타고 국경도시 산크리스토발에 도착하니 새벽 5시도 채 안되었다. 버스터미널 바깥 세계는 멈춘 듯 고요했다. 섣불리 나가면 안 될 것만 같은 음침한 분위기이다. 터미널 내부에는 나와 같은 신세의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 현지인이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외국인 배낭여행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배낭여행자들은 서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옷차림이나 배낭뿐만 아니라 그들이 풍기는 정돈되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그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눈을 마주 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Hi', 'Hello' 하고 인사한다. 더 이상 어떤 말을 이어가지 않아도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 시야 내에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 하지만 배낭여행자들은 대개 붙임성이 좋아 금세 옆으로 다가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갈 건지에 대해 물어본다. 물론 나 역시 배낭여행 한정 붙임성이 있었다. 아쉽게도 한국에 와서는 사라지고 말았지만.

 사람들은 희미한 등을 켜 둔 곳에 집중적으로 포진해있는데 마땅히 앉을 곳이 없이 땅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물론 대합실에 의자가 몇 줄 있었으나 그곳은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 뭔가 잘못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 밝은 곳에 있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거리를 두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옆에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있어 그래도 이곳이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닐 거라는 안도가 되었다.

 어느새 캄캄하던 터미널 안으로 빛줄기들이 서서히 들어오고 멈춰 있던 세계가 천천히 움직였다. 새벽의 고요한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많은 인파들로 터미널 주변이 북적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 밤이 무사히 지나가서 다행이다. 도중에 길거리 생활을 십 년은 넘게 한 듯 보이는 노인이 구걸을 하여 깜짝 놀라긴 했지만 거절하니 순순히 물러섰다.

 콜롬비아로 가기 위해서는 브라질에서 베네수엘라로 넘어갔던 것처럼 택시를 타야 한다. 택시로 국경을 넘는다는 건 영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건너편에 택시가 몇 대 서 있어 발을 옮기려는 순간 건장한 체격의 남자 경찰 두 사람이 막아섰다.


"잠깐 멈추세요.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지금 콜롬비아로 넘어가려고 해요."


 잔뜩 긴장하여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어디선가 베네수엘라는 경찰이 제일 나쁜 놈이고 도둑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떠올랐다. 그만큼 경찰이 부패되었고 자국민들도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5분만 일찍 택시를 잡아 탔다면 베네수엘라를 유유히 떠날 수 있는데 하필 경찰을 만날게 뭐람. 그들이 뇌물을 요구할 수도 있고 또 최악의 경우 여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경찰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더니 나에게 여권을 달라고 했다.

 외국에서 여권은 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에 목숨과도 같이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여권이 없다면 불법 체류자 신세.. 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보고타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한 달간 꼼짝없이 묶여 재발급을 기다린 한국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여권을 달라는데 무슨 수로 거절할 수 있을까? 마지못해 여권을 내어주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굴욕스럽긴 했으나 얼른 이들이 나를 단념해주길 발라뿐이었다. 그들은 내 여권을 보면서 조금씩 웃기도 하며 풀어진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내 사진이 웃긴가?). 그리곤 나에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저기 있는 택시를 타고 가면 됩니다."

경찰관은 여러 택시 중 하나를 콕 집으며 말했다.

"Gracias(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찰관이 지정한 택시로 갔는데 이게 웬걸 아주 오래된 고물 택시 눈앞에 떡하니 있었다. 기사에게 커미션을 받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운전석 쪽에는 전선이 복잡하게 엉켜서 외부로 드러나 있었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데다 시트도 이곳저곳 뜯겨 나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기엔 내 스페인어는 형편없었다. 이걸 타고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하곤 다른 택시를 찾고 싶었으나 그들이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다른 택시를 탄다면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하여  잡으러 올 것만 같아 순순히 짐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젊은 부부와 꼬마 아이와 동승하게 되었다.





 걱정과는 달리 나이가 지긋하신 택시기사가 모는 고물 택시는 구불구불한 도로와 오르락내리락 경사진 길을 별문제 없이 내달렸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동동 떠다녔고 초록빛 시골의 정경이 눈을 말끔히 씻겨주었다. 모로코이 국립공원을 기점으로 해서 베네수엘라와는 인연을 다했다는 생각에 얼른 콜롬비아로 넘어가고 싶어졌다. 아니 벗어나고 싶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택시가 멈춘 곳은 콜롬비아 출입국사무소였다. 하지만 그전에 베네수엘라 출입국사무소에서 출국 도장을 찍어야만 했기에 선뜻 내리지 못하고 갸우뚱했다. 베네수엘라 출국 도장을 찍지 않으면 콜롬비아에서 입국 도장을 찍기 어렵지 않나? 다급하게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여권에 도장을 찍는 시늉을 하며 우리가 달려온 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어쩌란 소리야?'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좌석에 앉은 젊은 부부도 나에게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출국 도장 따위는 상관없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콜롬비아 입국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다시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으나 아저씨는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혼자라도 다시 돌아가 출국 도장을 찍으려 택시를 박차고 나왔으나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순간  멀리서 오토바이를   곱슬머리의  또래의 젊은 여자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는 "혹시 도움이 필요해?"라고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는 그녀처럼 오토바이를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황해서 흔들리는 외국인의 동공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는 거지.

"베네수엘라 출국 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택시기사가 이곳에 내려줬어."

" 알겠어. 별로 멀지 않아.  뒤에 타면 ."

그녀는 아주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그녀의 말처럼 베네수엘라 출입국 사무소는 멀지 않았다. 거의 10 만에 도착한  같다.(어쩌면 그보다  걸렸을지도) 그녀는 밖에서 기다릴 테니 도장을 찍고 나오면 된다고 했다. 건물에 들어가서는 줄이 길지 않아 5분도  걸려 도장을 찍고 나올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콜롬비아 출입국 사무소에 내려준  입국 도장을 찍는  도와주고는 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물론 그녀에게 비용을 지불했지만 무사히  번째 국경을 넘을  있는 것에 비하면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역시 베네수엘라에서 이동하려면  가지 이동수단은 거쳐야 한다 것이 확실해졌다.

그녀는 밝게 미소 지으며 "여행 잘해!"라고 인사하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지금도 그녀는 오토바이로 국경을 넘나들며 방황하는 여행자를 구해주고 있을까? 어쩐지 다시 그곳에 가면  번에 그녀를 알아볼  있을  같다.


이전 14화 함께였어도 결국 배낭여행은 혼자가 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