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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Feb 08. 2022

세상의 중심에서 내려온 여행자


쏴아아-


 한밤중 빗소리가 높은 엔젤 폭포수의 낙하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정글 전체를 울리고 있다. 빗물이 수풀을 시원하게 적신 덕에 비 내음이 한층 상쾌하게 느껴진다.


 해먹에 누워 뜬눈으로 뒤척인다. 결코 해먹이 불편해서가 아니다. 해먹은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고 덤으로 담요까지 덮으니 이보다 안정적일 수 없다. 잠을 방해하는 건 이 순간 느껴지는 모든 것을 쉬이 덮어두지 못하게 만드는 아쉬움뿐이다.                                                                                                                                                                         

 

 활기 넘치는 남미의 하루가 저버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의식이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나에게로 집중된다. 남미에 있는 나의 마음은 비유하자면 열렬히 짝사랑했던 상대와 이루어진 것 같달까? 동경하는 대상을 실제로 마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믿기지 않는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현실이 맞아?' 누구라도 붙들고 확인하고픈 마음이다. 하지만 해먹 속에서 고치처럼 깊이 잠든 친구들을 괴롭힐 수 없다.






 미칠 듯 추운 베네수엘라 야간 버스부터 경비행기와 모토 보트까지 다양한 이동수단을 거치면서까지 카나이마 국립공원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온 건 엔젤 폭포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물론 엔젤폭포를 두 눈에 담는 건 멋진 일이다). 엔젤폭포 그 자체보다 그곳의 한 부분이 된 나의 모습을 더욱 열망했다. 남미의 멋진 배경이 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정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여행은 그곳을 음미하는 여행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도취된 여행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여행지의 역사라던가 독특한 지형 따위에는 흥미가 없었던 거다. 어째 나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것 같긴 하다만 적어도 그것이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뻔뻔함은 나르키소스처럼 더욱 깊숙이 자신의 모습에 빠져듦으로써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을 만끽한다. '난 정말 멋진 것 같아', '지금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어!' 아마 지금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한다면 부적절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주책처럼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만약 그런 시절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고 확신에 차 의기양양하던 때가 없었다면? 남미로 떠나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다. 높은 확률로 사는 곳도 직업도 만나는 사람들도 다를 테지. 그런 상황은 실제로 알 길이 없어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쪽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도 없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시절이 일몰처럼 따스히 저버리고 지금은 세상의 작은 조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주 신기하게도 그런 변화를 저항심 없이 잘 받아들인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나에게 쏠려있던 시선을 바깥으로 서서히 돌려 주변 사람과 사물을 애정 어린 시선과 관찰하는 태도로 대하고자 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나 홀로 둥둥 떠 있던 우주 속에 온갖 것들을 담으려고 하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성한 곳이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뻔뻔했던 과거의 내가 다시 나타나 '난 정말 멋진 것 같아', '지금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어!'하고 알려준다(가끔 게을러서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으나).


 무료한 오후 카페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문득 세상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그립다고 해서 다시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리운대로 그 자리에 두고 그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에 미소 지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있을 행운을 가진 젊은 여행자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할 수 있다면 더없이 흡족할 거다.


너무 노인같이 이야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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