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역사와 인물, 꼭 들러야 할 곳, 함께 하면 좋을 책이나 영화, 먹어봐야 할 음식, 놓치면 안 되는 행사 등과 같은 것 말이다. 자신이 가진 정보만큼 여행을 더욱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고,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여행지는 옆동네처럼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속에서 그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런 수고로움에는 인색했다. 이제야 다시 여행을 정리하면서 내가 머물렀던 곳들에 대한 정보를 구글을 통해 새롭게 습득하는 중이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여러 텍스트를 통해 내가 얼마나 흥미로운 곳에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를 새삼 느끼는 중이다. 덤으로 자부심까지 따라오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엔젤폭포의 이름은 미국인 모험가 제임스 엔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과 폭포 하부에 퍼지는 포말과 안개가 끼었을 때의 모습이 마치 천사의 날개와 같아서 엔젤폭포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로 나뉜다. 1935년 제임스는 정글을 비행하던 도중 근처 비행장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1937년 다시 한번 찾아가 정확한 위치를 잡았다고 한다.
엔젤폭포의 높이는 979m이고 물줄기 길이만 측정해도 808m나 된다.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15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 2.5배 더 높다고? 엔젤 폭포를 먼발치에서 바라봤을 때는 그 정도의 높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고, 코 앞에서 보았을 때는 높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런 정보를 신기해하는 나를 가만히 보자니 얼마나 이 여행에 대해 무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할 만큼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버스가 시우닷 볼리바르에서 멈춰 서자 승객들 모두 탈출하듯 튕겨져 나왔다. 우리는 서로의 생사를 확인한 뒤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밝은 햇살 아래 마주한 동료들의 얼굴에는 어떤 구김도 없었다. 여행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얼마나 힘들었든 간에 그 순간이 지나면 단숨에 스르르 풀리는 친구들의 맑은 표정. 여행에서는 '이쯤이야' 하는 다부진 마음가짐을 장착하나 보다. 그 덕에 나 역시 툭툭 털며 괜찮아질 수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서 씩 웃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다들 버스 안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없어(아마 나처럼 악몽을 잔뜩 꿨을 테지) 많이 지친 상태라 오늘 하루는 근처 숙소에서 푹 쉬기로 하고 다음날 엔젤폭포에 가기로 했다.
엔젤 폭포가 있는 카나이마 국립공원은 하늘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다음날 비행장에는 아주 아담한 크기의 경비행기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다섯 명의 멤버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 타야 할 만한 크기였다. 경비행기라 하더라도 스무 명 안팎으로 탈 수 있는 크기인 줄만 알았던 나는 잠시 당황했다. 영화에서는 이런 비행기를 타면 높은 확률로 추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그런 무서운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형 항공기를 탔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날아오르는 생생한 감각이 전해져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발아래 거대한 카나이마 국립공원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었다. 마치 미지의 땅을 발견한 모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위성으로 지상의 모든 곳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시대에서는 더 이상 이런 기분을 실제로 느낄 수 없게되어 안타깝다. 그란 사바나의 넓은 초원 사이로 가지처럼 뻗어져 있는 작은 강들이 커다란 강으로 모여든다. 붉은빛 강물이 생명력 넘치게 흐르고 있다.
로라이마에서는 여행자를 쉽게 찾아볼 수 없어 9명의 멤버가 똘똘 뭉쳐 의지했었는데 경비행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가득차 북적였다. 왠지 이곳에는 여행자라기보다는 관광객이라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관광객은 여행사를 통해 단체로 오는 배낭이 가벼운 사람이다. 이들 대부분은 크로스 백을 매고 있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우면서도 활기찬 주변 분위기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낯선 오지에 고립되어 있다 구조된 듯 현실감이 없었다.
엔젤폭포까지 가려면 국립공원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야 해서 이번에 우리는 다시 10인승의 빨간 모토 보트에 몸을 실었다. 보트는 부왕부왕- 큰 소리를 내며 후룸라이드처럼 격렬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 반동으로 강물이 얼굴까지 차갑게 적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커다란 강의 주변에는 녹빛의 그란 사바나가 우거져 있었고 테푸이가 한폭의 그림처럼 쉼 없이 이어졌다. 물론 로라이마의 크기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다시 테푸이를 만나 반가웠다.
하늘은 깨끗하고 맑았으며 하얀 구름이 조각조각 여유롭게 떠다녔다. 따스한 햇빛을 머금은 반짝이는 강물을 가르며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엔젤 폭포의 머리가 조금씩 보이자 보트는 더욱 신나게 팡팡 뛰어올랐다. 육지에 다다라서야 보트는 서서히 시동을 꺼트리고 부드럽게 정지했다. 앞장선 가이드를 따라 걸어가니 엔젤폭포가 한 걸음식 성큼성큼 다가왔다.
엔젤폭포는 폭포라기보다는 마치 물줄기를 토해내는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어 이과수나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이 부피가 큰 폭포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거친 테푸이 속에 위치한 엔젤폭포는 아주 먼 옛날 기다란 초식 공룡이 어슬렁 거리며 노니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질 정도로 야생적이다.
도착한 캠핑장은 강 건너 엔젤폭포가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로 된 기둥이 몇 개 세워져 있고 판자가 한 겹 얹어져 지붕 역할을 했는데 비를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출발할 때의 맑은 하늘은 사라지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니 더욱 걱정되었다. 다른 가림막도 없이 해먹이 여러 개 대롱대롱 걸려있어 얼핏 수용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누어보는 해먹이 생각보다 편하고 아늑했다. 무엇보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재미있었다.
강 너머 엔젤폭포를 카메라로 줌인하여 찍고 있는데 가이드가 다가와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그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고 서 있으라며 직접 시범까지 보였다. 엘젤 폭포의 물줄기를 마시는 듯한 그런 포즈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어느 관광지나 시그니처 포즈가 있다. 피사의 사탑에서 기울어진 탑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치는 포즈, 로마에서는 진실의 입에 손을 넣는 포즈가 바로 그것이다. 살짝 민망했으나 덕분에 재밌는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캠핑장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팀이 더 있었는데 역시나 모두 남자였다. 남미에서는 여자 여행자를 발견하기 어려워 어느새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늘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물어본다. 그들의 선택지에는 한국인은 없다. 나는 한국, 그것도 남한에서 왔다고 콕 집어 이야기해준다.
저녁이 되자 전기가 없는 이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대신 이곳저곳에 켜 둔 작은 촛불에 의지해야 했다. 숲 속에서 촛불만 켜 둔 채 식사를 하니 나름 분위기 있는 저녁이 되었다. 더 늦은 밤이 되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드럼을 치듯 판자를 거세게 두드렸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며 사람 얼굴도 분간하기 어려워지자 우리는 아주 이른 저녁부터 해먹에 누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았으나 엔젤폭포로 가는 일정을 미룰 순 없다. 안개까지 심해서 눈앞에 있는 사람만 겨우 볼 수 있는 상태에서 길을 나섰다. 그래도 로라이마의 하드코어 일정을 소화한 우리는 정예부대처럼 꿋꿋이 비를 뚫고 나갔다. 우거진 수풀과 미끄러운 돌로 이루어진 땅 위를 긴장을 놓지 않은 채 한걸음 한걸음 밟아 나아가야 했다.
가까이에서 본 엔젤폭포는 목을 한껏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솟아있다. 안개인지 폭포의 포말인지 모를 하얀 연기가 그 높이를 따라잡으려는 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엔젤 폭포 아래에서 우리는 비에 쫄딱 젖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지만 물이 넘쳐흐르는 폭포수를 배경으로 비장하게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또 한 번 새로운 곳에 발을 딛게 된 서로를 격려해주었다. 비가 많이 와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고 바로 돌아와야 해서 아쉬웠다. 날이 좋았다면 이곳에 널브러져 폭포가 떨어지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