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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Jan 30. 2022

베네수엘라 버스는 왜 이렇게 추울까


"엄마, 내가 베네수엘라에서 버스를 탔는데 진짜 추웠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의 등 뒤에서 나는 그 때를 떠올리며 상기되었지만 조금은 안도하듯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어떤 미동도 없이 화면만 주시할 뿐이다. 갈 곳 없는 내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거실 안에 울려 퍼진다.

"진짜 추웠다니까?"
한 층 목소리를 높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엄마는 마치 유리벽 너머 다른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고(혹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찰나, 눈이 번쩍 뜨여진다.


 주변은 온통 어둠이다. 어숨푸레한 비상등 불빛으로 겨우 사물이나 사람의 실루엣을 볼 수 있다.  목을 쭉 빼서 둘러보니 승객들이 마치 구겨놓은 짐짝과 같은 모양새로 늘어져 덜컹거리는 움직임에 맞춰 무방비하게 흐느적거린다. 내 옆자리에는 두꺼운 옷으로 꽁꽁 싸맨 조나단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아 흠칫 놀란 나머지 그가 숨을 쉬는지 확인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다른 사람을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살을 파고드는 추위가 온몸을 고통스럽게 찌른다. 불과 1분 전에 나는 이 기나긴 여행을 마친 후 안락한 집에서 속 편히 지금을 회상하고 있었다.

엉엉 울고 싶어 졌지만 눈물조차 얼었는지 나오지 않았다.





 로라이마 다음으로 떠날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폭포인 엔젤폭포(스페인어 발음으로 앙헬 폭포)이다. 엔젤 폭포는 베네수엘라에 간다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 중 하나이다. 9명의 트레킹 멤버 중 나를 포함하여 알롱, 사쿠, 조나단, 앤드류 다섯 명이 함께 가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여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트레킹을 마친 다음날 다른 멤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엔젤 폭포 멤버들은 저녁 늦게서야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산타 엘레나에서 엔젤폭포가 있는 시우닷 볼리바르행 밤 버스를 타게 된다. 남미에서 밤 버스를 탄다는 것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한다는 의미이다.  

"옷을 더 껴입는 게 좋을 것 같아."

버스를 타기 직전 사쿠가 나에게 슬쩍 일러주었다.

 베네수엘라 버스의 악명을 익히 들은 나는 이미 많은 옷을 껴입은 상태였다. 여기서 더 옷을 껴입는 건 상당히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사쿠가 신경 써 준걸 괜찮다며 거절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얼른 화장실에 가서 남은 옷을 몇 벌 더 걸쳤다. 만약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동사한 채로 발견되었을 수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차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승객들을 가만히 바라보니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심상치 않다. 두꺼운 담요를 온몸에 돌돌 말고 있는 사람도 있고 침낭을 어깨에 메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굳이 저렇게 까지?'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현명했다. 무방비한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그때 눈치채야 했다.

 이 년 전 친구와 눈이 내리는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있다. 눈발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출발한 게  잘못이었다. 순식간에 눈은 시야를 가렸다. 양볼에는 감각이 없어지고 두 발은 얼음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듯했다. 히말라야에서 조난을 당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때 느꼈던 추위가 베네수엘라 버스에 비하면 보잘것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쉬쉬쉭- 무자비하게 에어컨이 작동한다.

 왜 이렇게 버스 안이 냉장고 아니 냉동고가 될 정도로 에어컨을 강하게 트는지 미스터리다. 유전국이라 기름이 남아 돌아서 그런 건가? 과연 버스 기사실에도 에어컨을 이토록 빵빵하게 트는지 내려가서 확인하고 싶다. 만약 여기만큼 춥지 않다면 버스 기사의 멱살을 잡아야겠다. 당장이라도 "Stop!!!"이라고 외치며 버스를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이곳은 한국과 정 반대편, 남미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 베네수엘라이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잠드려 애쓰는 것이다. 아니면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다. 짐이 될거라며 바네사 집에 두고 온 침낭이 그리웠다.

 일부러 다른 친구들에게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가는 게 고통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도착시간을 알았더라면 매 분 매 초마다 시계를 확인했을 테니까.

나는 무려 10시간 동안 움직이는 냉동고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세상이 새하얀 겨울 추위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베네수엘라 버스보다 춥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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