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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당근 Apr 12. 2022

침보테 터미널 속 따스한 슈퍼마켓

침보테


 여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정들었던 장소와 사람들을 떠나 홀로 긴 시간 동안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남미에서는 이동시간이 10시간 이내라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로 땅덩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믿기 힘들겠지만 보고타에서 키토까지는 무려 34시간이나 걸렸다. 큰 소리로 음악을 틀고 시끄럽게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귀를 틀어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옆자리의 페루에서 온 레바호는 "저렇게 시끄러운 사람들은 다 콜롬비아 사람들이야"라고 말하고는 눈을 질근 감고야 말았다.  


 아무튼 홀로 버스를 타는 건 돌덩이 같은 막막함과 외로움을 가슴에 얹는 심정이다. 나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버스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이 여행에서 멈추는 선택지는 없다. 그 순간 여행은 끝이 나버리기 때문에 그저 앞으로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했지만 쉬이 잡히질 않았고 내 몸과 마음은 늘 긴장상태였다.  


 특히 밤 버스는 더욱 최악이다. 얕은 잠을 자다가 번뜩 눈을 뜨면 웃으며 인사를 했던 옆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낯선 이가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짙은 수염이 잔뜩 난 남자라면 더욱 이곳이 낯설고 무섭게만 느껴졌다.


 열흘간의 벨몬트 호스텔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떠나는 날이다.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무르면 너무 지겨워서 얼른 떠나고 싶다가도 막상 당일이 되면 '좀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나약한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땐 미련 없이 버스표를 끊고 휘리릭 떠나야 한다.  


 전날 중학생 아들과 함께 오신 여성분이 베네수엘라는 지금 화장지, 분유, 비누와 같은 생필품이 부족하여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브라질에서 아르헨티나 방향인 대륙 아래로 도는 루트를 선택했더라면 베네수엘라에는 발도 대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목적지인 페루 쿠스코로 가기 위해서는 침보테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 한구석에서 덩치가 크고 험악해 보이는 아저씨와 계속 눈이 마주쳤다. 만약 그가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크게 오해할 뻔할 인상이다.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기에 멀찍이 떨어져 버스를 기다렸다.  


 키토에서 출발한 버스는 에콰도르와 페루의 국경에 위치한 출입국사무소에서 잠깐 멈췄다. 이곳에서는 출국 도장과 입국도장을 한 번에 받을 수 있어 무척이나 편리했다. 무사히 입국 절차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 다시 한참을 달리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작은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페루의 첫 정거장 망코라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익숙한 내음이 난다 싶더니 저너머 바다가 눈에 보였다. 고요한 바다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그 위에는 작은 배가 여러 척 띄어져 있고 작은 집들이 군데군데 있는 걸 보니 작은 어촌마을인가 보다. 바다 위를 빙빙 날아다니는 새들은 갈매기처럼 보이는데 특이하게도 검은색이다. 어쩌면 갈매기가 아닐 수도 있겠다.  


 침보테에는 언제 도착하는지 궁금하여 버스기사님께 물어봤지만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제스처를 보내셨다. 그때 키토 터미널에서 본 아저씨가 다가와 버스기사와 몇 마디 주고받고는 나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주셨다. "새벽 4시에 도착한데요. 그리고 침보테에서는 리니아나 모비스터라는 버스회사를 이용하면 좋다고 하네요." 아저씨는 내가 미처 물어보지 않은 정보까지 알아내어 친절히 알려주셨다.


 이를 시작으로 아저씨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는 페루 사람이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고 오랜만에 딸과 함께 고향에 간다고 했다. 아저씨는 나에게 페루의 명물인 세비체와 잉카 콜라를 맛볼 수 있도록 나눠주셨다. 한 번쯤 먹고 보고 싶었던 잉카 콜라는 환타 파인애플맛으로 꽤 먹을만했고 세비체는 회 위에 레몬 소스를 뿌린 것만 같았는데 아주 상큼하고 맛있었다. 맛이 괜찮냐고 미소 지으며 물어보는 아저씨를 크게 오해한 게 무척이나 죄송해졌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쉬는 타이밍에 버스를 함께 탄 콜롬비아 청년들과 버스기사 아저씨가 나에게 사진을 요청했다. 그리고 페루 아저씨도 딸 카리나와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들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나 역시 내 카메라로 귀여운 카리나와의 사진을 남겼다. 


 카리나는 3살이고 아저씨와 판박이로 얼굴이 똑같이 생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귀여웠다. 수줍음이 많아 내가 말을 걸면 몸을 베베 꼬았다. 이번에도 역시 남미 사람들이 도대체 왜 나와 사진을 찍고 싶은 건지 물어보지 못했다.  


 버스 안이 추워서 깊이 잠이 들지 못했는지 이상한 꿈을 잔뜩 꿨다. 꿈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너무나도 이상해서 얼른 깨고 싶은 꿈이었다. 버스에서는 도저히 깊이 잠들 수 없다. 기사님이 몸을 흔들어 눈을 뜨니 침보테 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내리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지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페루 아저씨만이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셨다.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다.  


“Chao(차우,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굿 럭”

아저씨는 활짝 미소 지으며 엄지를 들어주셨다.




 시간은 새벽 네시 반을 향하고 있다.  


 해가 뜨지 않은 차가운 새벽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길을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아니니 주저앉아 울 수도 없고 또 누가 떠밀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니 더욱이 나오려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남미 사람들은 담력이 큰지 버스가 새벽 한가운데 도착하는 시간표가 많다. 어쩌면 이들은 금방 돌아갈 곳이 있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여행자인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하다.  


 여행에서는 (당연하지만) 항상 낯선 곳에 도착한다. 다행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이곳이 그리 무시무시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 익숙해지고 그것들에 하나씩 의미를 더하게 되면서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할 때가 온다. 여행자의 숙명이랄까? 한 곳에 머무는 건 선택지에 없다. 그대로 머무르다간 여행은 막이 내리니까.


 등에 맨 커다란 배낭은 방금 내렸던 버스인 크루즈 델 수르(cruz del sur) 사무실에 맡기고선 앞으로 맨 작은 가방을 등으로 고쳐 맸다. 터미널에 사람이 없어 당황하던 찰나 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니 몇몇 사람들이 동그랗게 말려져 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살짝 안심은 되었지만 터미널 안이 엄청나게 추웠기에 저렇게 자다간 꽁꽁 얼어 그대로 굳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제 점심 이후론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 상당히 굶주린 상태였다.  


 그 순간 어두운 통로 속 저 끝에서 따스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다가가 보니 작은 매점이었는데 유리 뒤편 가판대에 반들반들 맛있어 보이는 빵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정겨운 소리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홀린  문을 여니 한눈에도 미인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주인아주머니와 손님으로  가죽 재킷의 아저씨 그리고 부드러운 인상의 아주머니가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보이며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가게의 불빛이 내게도 따뜻하게 쬐어지는 듯했다. 여자 손님은 나를  안기까지 했다. 이런 환대는 처음이라 어정쩡한 차렷 자세로 굳어 버렸지만 어느새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저씨는 명함을 주셨는데 스페인어라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림을 보니 의류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거라 짐작되었다. 나중에 주인아주머니께 옷을 몇 벌 보여주시는 걸 보곤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아주머니는 음악 선생님이셨는데 그녀는 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나를 안으며 애정 어린 눈길을 마구마구 보내주셨다.


 여행을 할 때는 풍선처럼 이리저리 붕- 떠다니는 기분이다. 하하호호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이곳을 언젠간 떠날 수밖에 없고 이들도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를 꼭 껴안아주는 누군가가 있으니 너무나도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인아주머니와 똑같이 생긴 귀여운 남자아이가 나왔다. 방금까지 잤던 기색 없이 눈이 똘망똘망했다. 아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스스럼없이 우리에게 다가와한 명씩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의젓한 아이의 손에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이 거쳐갔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이의 이름은 요페이, 12살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하며 더 친해지자 아이는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슈퍼마켓 이곳저곳을 들추며 군것질거리들을 챙겨주었다. 살짝 주인아주머니의 눈치가 보였는데 오히려 더욱 활짝 웃고 계셨다. 요페이는 도마뱀 모양 장난감, 색칠공부 책, 색연필 세트 그리고 동전 통을 뒤적거리더니 뭔가 특별한 동전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새겨 주었다. 마치 부적을 받은 것처럼 든든했다.


 나도 요페이와 음악 선생님께 한국에서 산 책갈피를 주었다. 그녀는 크게 감동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작은 향수 샘플을 주셨다. 요페이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던 영어로 된 어린 왕자 책을 주며 이다음에 커서 한국에 놀러 오라고 했다.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아침해가 밝아와 있었고 와라즈로 가는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요페이는 앞장서서 버스 안에 폴짝 들어가더니 버스표를 보며 요리조리 좌석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내리기 전 요페이가 가게에서 알려준 (손바닥을 서로 위아래로 치고 주먹을 치는) 특이한 악수를 했다. 그대로 헤어지나 싶었는데 다시 돌아와서는 음료수와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먹고 싶었던 바나나 과자를 손에 쥐어 주고 버스에서 후다닥 내렸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요페이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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