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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Mar 10. 2019

내가 예민하고 까다로운 종족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답게 살기로 했다

'센서티브'(원제: Highly Sensitive People)라는 책이 열풍을 일으킨 이후, 묻혀 티 안 나게 살고 있던 세상의 예민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신체적인 감각과 정신적인 센서가 더 예민하게 많이 발달되어 어찌 보면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근 몇 년래 '사피엔스'가 사상적 관점에서 인생의 책이었다면, '센서티브'는 실질적으로 내 삶에 큰 도움을 준 책이다. 이 책 이후 사람들은 본인의 예민함에 대해서 깨닫기도 하고, 인정하고, 또 자신감을 가지고 조금씩 숨기지 않는 글들을 이제는 종종 보게 되어 글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는 요즘이다. 나 역시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 센서티브 한 종족 #


나의 경우는 후각, 청각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체의 센서가 사소한 자극도 매우 빠르게 감지하고, 빠른 눈치에 종종 사람들이 놀란다. 매 순간순간 진심과 거짓, 의도, 본심 따위를 나도 모르게 끝없이 재고 있고, 직접 관계없는 일에도 쉽게 감정 이입되는 스타일이다. 그만큼 불필요한 슬픔이나 부당함으로 인한 화도 많이 느끼는 만큼, 반면 화창한 날씨나 2천 원짜리 맛난 과일주스와 같은 또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그냥 하루 종일 행복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남들 이상으로 사소한 것까지 크게 느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에 따르면 외향적인 성향과 센서티브함은 전혀 다른 카테고리이고, 실증적으로 센서티브 한 사람의 30% 정도는 내향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매우 외향적이고, 군중 앞에 나서는 것조차 부담 없는 타입이기에, 그냥 대범한 스타일이면서 동시에 성격은 더러워 거슬리는 게 많아 까칠한 타입이라고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책을 읽고 돌이켜보니 거슬리는 것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도, 미안한 것도, 재미난 것도, 슬픈 것도 많은, 그냥 남들 이상으로 감정 소모가 많은 타입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기본적인 감정 기복 그 자체가 큰 것은 또 아니다.


# 혼자 쿨한 타입 vs 혼자 꽁한 타입 #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는 일본 의사가 쓴 책에서는 정 반대 타입의 사람에 대한 이해를 크게 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둔감력'이 높은 사람은 남들(특히, 예민한 사람들)에게 실컷 피해를 주고 나서도, 스스로는 인지 못하거나, 나중에 알게 되어도  별 일 아니라며 세상 쿨하기에 스트레스도 덜 받고, 그래서 병도 잘 안 걸리고 오래 잘 산다는 것이다. 둔감력은 분명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매우 유리한 성향이다. 하지만, 둔감한 사람들은 본인이 거슬리는 것이 적기 때문에 남들도 그러리라 쉽게 생각하고 쉽게 내뱉을 확률도 크다. 그들은 예민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매사에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기에, 본인 기준에서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그냥 소심한 사람 탓이고, 본인 스스로는 대범하고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둔감한 사람들은 예민한 사람들이 상처받고 힘들어 입을 닫으면 "뭐가 그리 꽁하냐"고 다시 한 바탕 들쑤시거나, 시간과 함께 상처를 어느 정도 소화시키게 되어 비로소 얘기를 꺼낼 정도가 되면 "그게 언젠데 쪼잔하게 지금까지 얘기하냐"며 또다시 더블 펀치를 날리게 되는 일도 종종 있다. 물론 예민한 사람도 둔감한 사람도 누구나 똑같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또 완전 별개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둔감한 사람은 인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반면, 예민한 사람은 스스로 되새김질하면서 반성과 후회를 알아서 하니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확률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 호의와 호구 사이 #


센서티브 한 쪽에 가까운 내 기준에서는 '아'와 '어'까지도 안 가도, '야'만 해도 분명 다르다. 내가 가능한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딱히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아직 약속을 안 지킨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 호의가 의무로 둔갑하여 독촉하려 드는 뉘앙스가 약간이라도 풍기면 그것은 매우 사소한 시그널이라도 바로 거슬리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사소한 부분을 그야말로 모른'척' 넘어갈 수도 있었고, 어차피 대화의 결과를 요약한다면 결론에는 아마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이므로, 내가 괜히 까칠하게 한마디라도 짚고 넘어갔나 하는 후회가 드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한 성격 좋다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맥락이 아닌 메시지에만 집중하고 다른 불필요한 얘기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그런 '척'을 하고 넘어간다고 했던들 그런 사람들과 진심으로 더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참고 가까워진다고 한들, 그것이 앞으로 더 좋은 일 일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 둔감한 상대의 입장에선 아무 일도 없었을 테니 계속 다른 상황에서도 그럴 일이 반복될 것이고, 나는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거슬림'과 '아닌 척 참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넘기기'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친밀해 보임'을 이어가는 것이 누구에게 어디에 좋은 일인 것일까. 호의를 많이 베풀다 호구가 되었다고 한참 쌓인 후에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것이 쌓일 때까지 참고 계속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엇을 위해 그랬을까를 생각해 본다. 원래 안 그런 성향의 사람이 언젠가는 갑자기 스스로 깨달음이 와서 알아주고 미안하거나 고마울 리는 없다.


# 나는 당신이 불편하다 #


나는 관계에 있어서도 누군가와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그 불편함을 의문과 함께 내버려 두면서 상대방은 이유도 모른 채 슬금슬금 멀어지기보다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불분명한 불편함의 이유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쪽을 택하는 편이다. 원래 간도 크고 배짱 좋게 타고나, 살면서 긴장을 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 적은 나에게도 그런 대화는 실제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매번 그렇게 터놓고 말을 하고 나면, 후회보다는 의문이나 오해가 해소되는 등의 긍정적인 결과가 더 많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무던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사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센서티브 한 사람들은 그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더 피곤하다. 왜냐하면 분명히 거슬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꾹꾹 눌러서 어딘가로 치워버린다고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무던해 보이는' 사람으로 남기보다는, 의미 있는 소수에게라도 '진실된' 사람으로 남으려 한다. 다른 것보다 진심과 진실을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좇는 삶이 상대적으로 더 피곤한 일일 지라도 그게 '진짜'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용기'를 내는 것은 삶에서 반드시 응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은 그랬다.



사람마다 센서티브 한 정도라는 것은 결국 또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나도 분명히 누군가에게 어떤 부분에서는 둔감했을 것이고, 피해 주고 상처를 줬을 것이다. 예전에는 그런 사실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면서 연습을 통하여 내가 집중해야 할 감정과 신경을 덜 쓸 감정을 예전보다는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후회할 일이 생길 때마다 미래에 집중하곤 한다. 오늘 반성할 일이 생겼다면, 그래서 오늘 하나를 깨달았다면, 적어도 다음에는 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미 쏟은 물 한 컵은 다음에 물 한 바가지를 쏟지 않기 위한 교육비라고 생각하자. 나이가 드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적어도 과거의 내 부끄러운 모습보다는 더 성숙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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