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보편적일 지도 모르는 현실 엄마와 딸 이야기
# 펼쳐보지 못했던 발레 스커트 #
“아줌마나 되어서 아줌마답게 살 것이지, 그런 맞지도 않는 쓸데없는 짓을 대체 왜 하냐?”
20대 후반이 되어서 나 스스로 돈을 벌고서야 첫 장만한 발레 스커트, 그마저도 30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이 접어뒀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다시 꺼내, 이제 발레를 좀 배우려고 한다고 했더니 엄마가 하는 말이다. '어린 시절 한 번 못 시켜준 것이 짠하고 미안했다'거나, '지금이라도 너의 꿈을 응원한다'거나 하는 소설 속에나 읽어봤을 법한 그런 아름다운 멘트를 내가 현실에서 들을 리는 역시나 만무했다. 평생 이런 식의 얘기를 들으며 자라왔으니 이제는 좀 그러려니 할 때도 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아줌마나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버럭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위로받지 못한 내 안의 철든 어린이가 여전히 짠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름대로 꽤나 가성비가 나쁘지 않은 아이였던 것 같다. 피아노, 미술 기본 외에는 예체능에도 학업에도 딱히 큰돈 들여본 적 없고, 노래를 배우는 것도 시립어린이합창단에 내가 직접 지원해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활동을 지원받으면서 배울 수 있었다. 어린이 합창단을 3년간 하면서 노래를 더 잘하는 법, 다 함께 어우러져서 하모니를 내는 법, 무대에서 당당하게 끼 부리는(?) 법 등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데, '어린이' 합창단의 특성상 안무도 함께 배우게 되었다.
당시 무용 선생님께 칭찬도 많이 들었고, 노래보다 심지어 무용이 더 많이 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어 엄마 손을 끌고 발레 학원을 한번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엄마의 표정을 보니, 그건 나의 과욕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오는 길에 바로 엄마에게 발레가 하기 싫어졌다고 말하였다. 당시 우리 집의 수입이 얼마인지는 당연히 몰랐지만, 외벌이 애 셋에 발레는 사치라는 것 정도는 일찍 철든 장녀의 어린 마음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뒤로 엄마에게 40대가 되도록 발레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는 26세에 이미 아줌마가 되었다. 그 뒤로 지금 70이 될 때까지 아줌마로 살고 있으니, 아마 인생의 대부분을 아줌마로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과는 한참 다른 엄마의 시대에 '아줌마'란, 스타일보다 더 중요한 시간 효율을 위해 짧은 머리를 바짝 볶아 빠르게 감고 말린 뒤, 지긋지긋하게 끝도 없는 수 만개의 집안일을 손으로 일일이 직접 다 처리하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애 여럿을 키우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기준으로는 한가롭게 발레나 하고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잉여스러운 일로 비추는지는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런 마음의 빚 때문에 대기업을 들어가고 나서도 엄마 명품 가방 사주기 전까지 내 옷 한 벌 사 입지 못했었고, 뭐든 엄마가 해보지 않은 것을 내가 먼저 누리는 것 같으면 죄책감이 먼저 들었다. 문득 그러다 내 인생도 아무것도 못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이제는 엄마의 쿠사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레를 당당히 배울 수 있게 되었다.
# 우리 엄마는 왜 그랬을까? #
"네가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인생 첫 수능을 보고 온 저녁, 가채점을 해보니 아무래도 SKY를 갈 점수는 안 나온 것 같다는 얘기를 했더니 화가 난 엄마의 반응이었다. 망쳐서 누구보다 속이 상한 건 나인데 심지어 그런 소리를 들으니, 그 길로 바로 집을 뛰쳐나가서 강남대로에 뛰어들 뻔했다. 처음으로 당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첫 인생 최대의 고비였다.
'일 년간 네가 누구보다 최선을 다 한 것을 잘 안다. 원래 인생이란 최선을 다하고도 결과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최선을 다해본 경험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네 것이 되어 평생 자산이 될 것이니, 지금은 속상하겠지만 당장의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여태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푹 쉬어.' 나라면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줬을 텐데,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도무지 알아듣고 싶지 않은 언어였다. 우리 엄마는 그때 사건이나 뱉었던 말 같은 것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왜 우리 엄마는 기껏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을까? 우리 시대 많은 엄마들이 그랬듯이, 우리 엄마는 나의 성적을 본인 인생의 성적표처럼 생각해 왔다. 그래서 팔공산까지 가서 수능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고, 어떠한 집안 일도 나는 신경 쓰지 않도록 다 면제해 주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올인을 하게 되면 그 보상으로 본인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 당연하게 믿었던 것 같다.
엄마는 산골에서 학창 시절 내내 1등과 반장을 하고도 대학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라 일찌감치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밖에 없어서, 환경이 이 정도라도 받쳐주는데도 최선을 다해도 안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실패는 곧 그간 엄마의 실패와도 같았고, 그 세월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분하고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생각해 본다.
# 애 어른 vs 어른 아이 #
나는 ‘항상 맑은 윗물이 돼라’고 닦달받던 장녀로 태어나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였던 반면, 평생 이쁨만 받던 막내로만 살아온 우리 엄마는 아직도 철이 덜 든 애어른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세뱃돈을 받을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사이사이 끼워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부모님 결혼기념일, 생일, 어버이날 같은 때면 잊지 않고 꺼내 선물을 사두었다 혼자 온 식구가 깨기 전에 몰래 일어나 숨죽여 포장하던 아이였다.
내가 갓 10살이나 되었을 무렵, 반에서 1년 학교를 늦게 들어온 친구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게 무슨 대단한 흉이라고, 학부모 모임에서 쉬쉬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그날 밤 우리 엄마는 내게 바로 말을 했고, 나는 다음 날 다른 친구에게 말을 해버렸다. 갑자기 저녁에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아줌마가 우리 집에 쳐들어오더니, 나를 무지막지하게 다그치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질릴 정도로 계속 혼을 냈다.
그런데도 끝까지 우리 엄마는 그 아줌마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거나, 아이 이전에 어른인 본인의 잘못이라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엄마를 원망하는 어린이‘가 된 것이 아니라, 너무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 되었고, 누구보다도 '내 밑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보호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리더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배짱을 더 많이 타고나고, 어떤 사람들은 겁을 더 많이 타고 난다. 그건 태생적인 문제이니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엄마는 원래가 겁도 많고, 남의눈도 많이 의식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라고 겁이 더 없어지고,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냥 우연히 그런 사람이 내 엄마고 나보다 먼저 태어났을 뿐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이미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부터도 물리적으로 부재한 아빠를 대신하여 나에게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한 것 같다. 엄마가 운전을 할 때마다 늘 내 자리는 조수석이었다. 당시 네비도 없던 시절, 꼬마가 뭘 안다고 나보고 표지판과 길을 잘 보라며 의지하고 초행길을 나서는 불안하고 여린 엄마는 당시 겨우 삼십 대였다.
하지만 그 사이 칠십 노인 된 지금까지도 소소한 것들을 ‘어떻게 결정하는 게 좋을지’, ‘이건 괜찮은 건지’ 단호한 내게 확신을 갈구한다. 요즘은 만 네 살 손주를 보며 ‘나는 네가 요만할 때 이미 다 큰 줄 알고 그렇게 취급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한다. 당시 한 살과 두 살 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는 다 키운 아이가 맞긴 했다.
이러저러한 엄마의 성향과 상황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엄마의 결정적이었던 말들에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상처는 오롯이 받는 사람의 몫이다. 그것을 평생 지니고 사는 것도 치워버리는 것도, 준 사람은 해줄 수가 없는 일이다. 많은 경우 준 사람은 언제,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상대적으로 나보다 겁은 엄마가 더 많고, 둔감력도 엄마가 훨씬 더 높다. 그냥 한마디로 이건, 무조건 내가 평생 지게 되어있는 게임이다.
"아줌마나 되어가지고 결혼했으면 애나 낳고 살 것이지, 30대에 무슨 유학이냐"고 매번 얘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몇 년의 준비 끝에 결국 다녀왔고, "애나 낳았으면 그냥 있던 직장에 감지덕지하며 얌전히 붙어 있던가, 관두고 애나 키우지 뭐 하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결국 아랑곳하지 않고 출산 이후 이직도 했고, 여전히 전업 주부로 살 생각은 평생 없다.
나의 꿈들을 응원해주기는 커녕, 매번 나를 버럭 하게 기 꺾는 잔소리만 해대는 엄마이지만, 사실 냉정하게 결과적으로 바라보면 정작 커리어 우먼의 길을 가능하도록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것 역시 고마운 엄마이다. 당장 아이가 아프거나 내가 언제 무슨 일로 늦게 될 경우, 엄마가 곁에 없다면 실제적인 일들을 물리적으로 감당하기가 몹시도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실제적인 효용을 생각해 보면, 힘 빠지는 소리들이나 가스라이팅 같은 것들은, 얼마든지 내가 그저 감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또 평생 엄마에게 빚쟁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