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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Oct 16. 2019

회사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공적이면서 사적인 관계들

# 내가 아는 마지막 비서 #


한동안 옆자리에 앉아 근무했던 비서가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남기고 로그 아웃을 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도 직접 못 나눈 채 그렇게 사라졌다. 그녀는 참하고 열심히 사는 보통의 20대였다.


그녀와 처음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떵떵거리는 대기업에서 몇 개월마다 연장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불안정한 신분을 외주인력이라는 미명 하에 박봉으로 고용한다는 것에 놀랐고, 아무리 잘해서 매번 연장이 된다 하더라도 2년을 채우는 순간 계약이 자동 종료되는 조건이라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2년 이상이 되면 그 자리가 정규직이 되어야 해서, 아무리 마음에 드는 사람도 계약직 자리에 2년 이상 쓸 수가 없는 게 기업 현황이라고 했다.


그녀는 박봉의 월급을 메우기 위해서 퇴근 후에는 회사 길 건너 파스타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멀리 인천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주말에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의 많은 부분을 투자하여 요가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을 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초대졸의 졸업장까지 땄으니 그녀가 어린 날 열심히 안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밥을 사주면 단지 나이가 좀 더 많다는 이유로 ‘후식 커피까지 당연히 네가 사는 거지’하는 눈빛을 보내는 어린 정규직 친구들도 많은 회사에서, 같은 또래에, 불안한 신분으로, 정규직 친구들 월급의 몇 분의 일이나 받을까 싶은 그녀는 점심 한 끼 사주면 너무 고마워하며 한사코 차는 대접하겠다고 뛰어가는 양심과 예의가 바른 요즘 아가씨였다. 


우리나라의 탑 대기업이라고 하는 곳에서 하루아침에 비서 자리를 거의 다 없앤다고 하더니, 그녀와 어울리던 여럿이 단 몇 개월을 연장조차 못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내가 직접 만난 마지막 비서라는 존재였다.


# 임원을 이루지 못한 팀장 #


명문대 상대를 나와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최연소 팀장, 회사 역사에 남은 굵직한 성과들을 내면서 한 때 누가 봐도 1순위 임원감이었던 모 팀장이 퇴사 인사를 돌았다. 그는 그간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매일 술을 마시며 네트워킹하고, 모시던 잘 나가던 형님들의 라인도 쭉쭉 타고 했었지만, 결국 별 한 번을 달아보기도 전에 몇 기수 후배 밑 무보직 팀원으로 편입되는 수모를 이기지 못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50이나 됐을까 싶은 그는 외벌이에 장성하지 않은 애가 셋이다. 본인의 노후를 얼마만큼이나 별도로 준비해 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딴 주머니를 찼으리라고 짐작하기엔 너무도 회사 생활에 올인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좌천된 후 그의 심리 상태가 우울증 걸릴까 봐 매일이 조마조마하다는 옆의 후배들의 얘기를 들었던 터라 차라리 잘한, 용단 있는 선택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분 아래 속해있던 새까만 후배에게 물어보니, 맨날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더니 더 보지 않게 되어 속 시원하다는 말까지 한다. 회사에 대한 짝사랑이 지나치다 못한 사람의 말로 치고는 참으로 씁쓸했다.


# 임원을 이루지 못한 팀원 #


40대 후반인 동문 선배가 '이 직장에서 그간 정말 존경할 만큼 특출 나게 똑똑한 사람을 딱 두 명 만나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 한 명은 잘 나가 전무까지 되었지만, 새로 온 CEO가 데려온 다른 전무에게 파워 게임에서 밀려 아예 나가게 되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오래전부터 사내의 주요 핵심부서 팀장으로 돌면서 전사적으로 촉망받는 임원 0순위였던 부장님이라고 한다. 이 부장님은 본인의 직속 라인 임원이 일찌감치 밀려 나가게 되는 바람에 임원 승진의 타이밍을 놓쳤고, 이후 심지어 아랫 직원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면팀장이 된 채로, 훨씬 어리고 본인보다 덜 똑똑한 팀장들 밑에서 팀원인 상태로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경우였다. 


이 분의 이야기는 들어보니 무수히 내가 봐 왔던 ‘뒷방 늙은이’라는 면보직된 일반적인 보통의 어르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멋진 어른의 모습이었다. 일찌기부터 전략기획부터 상품팀까지 두루 다양한 핵심 분야의 팀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있고 인정도 받았으며, 회사를 위해 상당한 세월 고생을 많이 해 온 사람이기에 그 어떤 리더들보다 그 좌절감과 배신감이 훨씬 더 커 비뚤어질(?) 이유도 충분할 텐데, 오히려 그분은 지금도 본인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 어떤 팀원보다 기여를 많이 하며 열심히 다닌다고 하신다. 어린 후배 팀장 및 다른 후배 팀원들에게도 본인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서 두루 존경받으며 회사를 보람 있게 다니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원이 되었어도 존경은커녕 원성만 듣는 리더가 대부분인데, 실제로는 누가 더 진정한 리더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 성공을 해봤다는 사람들 #


한 대기업의 인력 개발원에 교육받으러 가서 무서운 괴담을 듣게 된 적이 있다. 불과 몇 달 전 임원 교육 세션에서 어떤 신임 임원이 이곳 기숙사에서 야간 과제를 수행하다 쓰러져 그 길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연수원 프로그램에서 자체 과제의 양이 현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생각해 보니 몇 년 전 왔던 이곳에서의 분위기가 그때보다 훨씬 여유롭고 널럴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신입일 때 뵈었던 어떤 열정적인 차장님은 넉살 좋기로 유명했는데, 한때는 정반대로 카리스마 넘치는 워커홀릭으로 회사의 중요한 업무를 전담하시다가 암에 걸려 병가를 쓰고 돌아오신 후에 보직도 내려두고 스타일이 완전히 바뀐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나의 첫 영업 팀장님은 전체 그룹사를 통틀어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는데, 본인의 특기를 살려 십수 년을 쉬지 않고 술 접대로 영업 실적을 화려하게 올리시다 어느 순간 위에 구멍이 심하게 나서 술은커녕 밥도 못 드시고 한 달 만에 그야말로 수십 킬로가 빠진 것도 보았었다. 그래도 그분은 결국 임원을 꽤나 오래 하시긴 했으니 헛수고는 아니었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임원이라는 별을 달고 직장 생활에 성공했다는 사람들 중에서 존경할만한 인생의 롤모델 찾기가 십수 년이 지나도록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려웠다.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의 원망을 들을 정도로 모질고 악랄해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내 세 번째 직장에서는 그야말로 실력도 최상이면서 인성마저도 최상이어서, 모든 사람의 존경마저도 받았다는 전설의 여성 임원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마지막 소식은 끝까지 미혼인 채, 개인적인 삶은 많이 누려보지도 못한 채 결국 52세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시게 되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끝이 났다.



어차피 내 회사가 아닌 일반 직장인인 이상,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퇴사를 한다. 그 회사에 조금 먼저 들어갔다고, 조금 더 오래 다닌다고 한들, 길게 보면 다 거기서 도찐개찐 아니겠는가. 사원증을 반납하고 돌아 나오는 그 순간부터 그 회사는 '우리' 회사가 더 이상 아니다. 그냥 내가 한 때 잠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일해줬던 회사일뿐인 것이다. 거기에서 남기는 것은 회사의 감사패도, 기업 로고 배지도 아니고, 그때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같이 으쌰으쌰 하면서 힘이 되어주었던 동료들, 회사 생활 잘하라고 피와 살이 되는 피드백과 애정 어린 조언을 주었던 선배들, 그리고 내가 자기들보다 연차 조금 더 많다고 잡스러운 일도 웃으며 많이 도와줬던 싹싹한 후배들. 남는 것은 사람과 추억뿐인 듯하다. (덤으로 병을 얻어서 나오는 것만은 절대로 경계해야 하겠다.)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니고, 업계를 떠나는 마당에 보면 전체적 평판이 뭐가 중요할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난한 평판을 가지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회사가 아니어도 앞으로 인생에서 같이 늙어가며 반가울 내 사람을 한 두 명이라도 건지고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맘 붙일 곳 있다는 심리적인 지지대는 회사를 다니는 중에도 아주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좋은 사람인 척, 썩어 문드러지는 속을 위선적 가면으로 가장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대신 단 몇 명이라도 진정한 내 편을 건지는 데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직급이 올라가면 갈수록 여러 가지 이유로 '새로이' 내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짐을 느낀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라지만, 그래도 슬픈 건 슬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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