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무례, 그리고 훈훈함 사이
# 지하철에서 만난 한 소년 스토커 #
아침 출근길이었다. 혼잡한 을지로 3가 역에서 환승하려는데, 건너편에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며 건너오던 중학생이나 됐을까 싶은 어리지만 덩치 있는 남학생이, 갑자기 게임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나를 따라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일부러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저 멀리 갔는데, 이상하게 저 멀리 수많은 오가는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부러 더 멀리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맨 앞 줄에 서 있는데, 스윽 저 멀리서 굳이 내가 서있는 줄까지 와 뒤편에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타는 척을 하다가 지하철이 도착하자마자 혼잡한 틈을 타서 그 칸이 아닌 옆 칸으로 잽싸게 바꿔 탔는데, 막판에 그 아이도 줄을 바꾸어서 내가 바꾼 칸으로 따라와 탄 것이 아닌가? 언뜻 봐도 눈빛이 불안정하고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예전에 봉사활동 하다 비슷한 눈빛의 아이와 잘 놀아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유도 없이 얼굴이 시뻘겋게 될 정도로 세게 싸다귀를 맞아본 경험이 떠오르면서, 그 예측할 수 없음에 약간의 공포까지 엄습했다. 최대한 티 안나게 슬금슬금 저 구석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그 학생이 아주 큰 소리를 치며 나를 부른다.
"누나 여기 자리 있어요!!! 임산부이신데 여기 와서 앉으세요!!!"
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타자마자 그는 제일 먼저 노약자석 한가운데 딱 한자리 빈 것부터 확인하고 나를 앉게 하려는 것 같았다.
임산부라도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험한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많이 들었고, 두 정거장 남은 상황이라 전혀 앉을 생각이 없었는데,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그 상황에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남학생의 그 순수함이 고마우면서도 왠지 미안하고 그가 우려스러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7개월 차 임산부 티가 나는 나를 '어렵게 따라와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의 오지랖 혹은 상대방의 부담스러움이나 공포,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등은 잘 보이지 않아 보이는 그 학생은, 아마도 남들과 조금은 다른 세계를 가지고 사는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이 매우 고맙긴 했지만, 그 아이가 커가면서 받을 것만 같은 수많은 오해와 상처들이 미리 벌써 안타깝고 걱정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좀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있을까. 그 학생이 많이 다치지 않고 사회에서 본인의 강점을 잘 발휘하면서 잘 섞여 살 수 있으면 좋겠다.
# 밥먹다 다가온 무례한 아줌마 #
어느날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줌마가 무례하게 뚱한 표정으로 예고도 없이 곁에 바짝 다가와서는 옆구리를 툭툭 친다.
"아 진짜, 이 아줌마 모야!" 하는 표정으로 난 아마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어라? 그런데 그 아줌마가 찌른 손에 내 지갑이 들려있다.
칠칠치 못하게 카드 잔뜩 든 지갑이나 흘리면서 내가 평화로이 밥 먹는 동안, 저 멀리서 그것을 보시고 한참 드시던걸 중단하시고 불편한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려와 굳이 와서 주워주신 거다. 생각해 보면 크게 소리를 치거나 하는 훨씬 덜 귀찮은 방법도 있었는데, 그 아줌마로서는 본인이 좀 더 귀찮더라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신 것이었다.
그렇게 뚱하니 말 한마디 없이 지갑을 내게 내밀자마자, 내가 말 한마디 하기도 전에 바로 무뚝뚝히 자리로 돌아 가셔서는 단 한번 뒤도 안 돌아보고 하시던 식사를 계속하신다. 끝까지 내겐 얼굴 보고 제대로 감사할 기회조차 안 주신다.
개인 간의 거리감이 확보가 안되어 외국인들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당황하는 부분이라는 얘기도 많이 듣지만, 또 그만큼 내 일이 아닌데도 굳이 나서서 발 뻗고 오지랖을 피우는 것 역시 한국 사람들 특유의 끈끈함이기도 하다. 세상 만물이 그렇듯, 모든 좋은 점과 나쁜 점에는 그 반대의 것이 항상 상존한다.
세상엔 천하의 나쁜 사람도 많겠지만, 훨씬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오늘도 인류는 반걸음씩 진보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아주 특출 나게 못된 사람들만큼, 또 특출 나게 선하고 잘난 사람들이 있으니 결국은 균형점의 어느 좌표에 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