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에 대한 고찰
지난 연휴는 나를 위한 시간 대신, 부모님을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픈 인생 모험도 많은 나는, 조만간 임신과 출산이라는 것을 선택하기엔 아직도 내 인생에 아쉬울 것들이 여전히 많다. 그중에서도 한동안 가장 아쉬울 다이빙을 훌쩍 떠나고 싶었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부모님께 잘하자는 올해의 목표대로 부모님과 잊고 지냈던 그 부모님들의 산소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으로. 그리고 그 선택은 너무도 옳았다.
#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우리는 누구도 본인에게 허락된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알지 못하는 시간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말처럼 누가 먼저 가더라도 마찬가지로 시간은 계속 닳고 있는 것이고, 확률 통계적으로 어쨌든 부모님의 인생은 나보다는 덜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인 기대 수명을 대입한다 해도, 아마도 여태껏 내가 봐온 시간보다 앞으로 볼 시간이 더 길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놈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속화되는 성질의 것이라, 아마 느껴지는 것으로는 길어야 여태 함께 보낸 시간의 반 정도나 남았을까.
한 달여 전, 전혀 모르던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하였는데, 태생적으로 매우 긍정적이고 활기차며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피드에는 얼마 전에 셋째가 태어났다며 행복해하는 사진들이 올라오다, 어느 날 급성 고열로 응급실이라는 사진이 올라온 후, 그 길로 다시는 집에 못 가고 3주 만에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와이프 분의 글을 보고 충격을 먹은 일이 있었다. 그는 애 둘 딸린 여성에게 청혼한 총각이었고, 친자식처럼 그 아이들에게 행복한 아빠 노릇을 몇 년 하다 드디어 처음으로 본인 핏줄인 아들을 품에 안은지 채 얼마가 되지 않은 채였다. 한 사람의 수명이란, 그가 얼마나 착하고 멋진 삶을 살았는지나 자식과의 시간의 시간이 얼마나 아쉬운지와 무관하게, 그리도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응원, 그리도 건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남은 시간 중에서도 온전한 시간이란 기껏 몇 번 일 지 모른다 #
우리는 많은 희망적인 조건 사항들을 가정하면서 살아간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중에 여유 생기면, 나중에 이거하고 저거 하고 나면 등등...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중이라는 단어는 꿈과 희망을 주는 말이지만, 사실 그 '나중'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운이 좋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아주 오랜만에, 20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산소 앞에서 엄마가 또 중얼거렸다. "우리 큰 딸 수능만 끝나면 울 엄마 서울에 내가 모시고 와서 꼭 일주일이라도 같이 보낼라고 예전부터 그랬었는데.." 결국 외할머니는 나의 수능을 한 달도 안 남기고, 알려진 지병 없이 돌연 자연사하셨다.
이번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기껏 국내 여행을 조금 다녔을 뿐인데, 그 사이 부모님은 많이도 노쇠한 것이 느껴졌다. 얼마 돌지도 않았는데, 금방 지치고, 사진 찍어보니 주름은 물론이고 이제는 키도 그 사이 많이 줄어든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이제는 최고급 식당에서 원껏 대접할 능력도 될 정도로 내가 드디어 다 컸는데, 이제는 부모님이 많이 드시지도 못할뿐더러 소화를 시키지 못하니 한사코 원치 않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언제든 돈도 많이 벌고 여유만 생기면 부모님 모시고 멀리 해외여행도 원껏 갈 수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미 아빠는 4~5시간 비행도 힘들어 더 이상 멀리 나가길 원치 않는다 한다..
# 효란 무엇인가 #
내가 인생에서 임신 출산을 선택하겠다는 것은, 그 어떤 다른 이유보다도 보수적인 양가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효이기 때문이 가장 컸다. 그리고 그런 삶을 겪어봐야만 나를 키워준 부모님과 인생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와 감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만 같기도 한 빚쟁이 같은 이유도 있다. 나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식 없는 이 삶 자체로 충분히 충만하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게 여전히 너무 많기에, 가끔 스스로의 니즈가 아닌 남들의 바람 때문에 내 자식을 낳겠다는 결심이 말이 될까를 여전히 고민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아무리 좋은 곳을 구경시켜 드리고 맛난 것을 사드린다고 한들 그리도 갈망하는 손주보다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사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다.)
내게 있어 '효'란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고민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살가운 딸이었던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저학년부터도 부모님 결혼기념일, 어버이날, 생신 선물을 등은 놓치지 않고 챙겨 왔던 아이였던 나는, 귀신도 도둑도 무서운 적 없는 배짱을 타고났지만, 언젠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날이 온다는 게 가장 무서웠다. 대학교 1학년 철학 과목에서, 상관없는 문제였음에도 마지막에 "결국 효든 뭐든 다 절대적인 개념과 기준은 없고, 그 실체의 본질은 본인의 만족감, 후회 등으로 남는다."는 답안지를 절절이 쓰고 싶은 멋대로 휘갈겨 쓰고 나왔는데, 의외로 A+이 나와 놀란 기억이 있다. 사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남들이 그로 인해 얼마나 만족감이나 실망감을 가졌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뭘 더 할 수 있었고,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각자 본인이 짊어질 후회의 양을 남길 것이다. 어떤 이는 한 것 없이 떳떳하고, 또 어떤 이는 끝없이 하고도 아쉬울 것이다. 결국 본인이 정한 수준 안에서 우리는 끝없이 갈구하고, 바둥거리고, 기뻐하고 또 슬퍼할 것이다. 효 역시 그러할 것이다. 시간은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