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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Mar 30. 2019

다 커서 부모님과 여행하며 알게 된 것들

살아가는 공부

서른 중반 되어서야 처음으로 부모님 두 분과 여동생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보게 되었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이제야 가게 되었는지. 당연히 가족 여행이니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한동안 오랜 기간 대부분 혼자 모험하러 다니던 여행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현재적 가치로는 서로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미래적 가치로는 나의 미래에 대한 힌트, 과거적 가치로는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추억이라는 것이다.


집안의 가장 큰 효녀이자 센스쟁이 여동생이 담당했던 것은, 여행을 가기 전부터 아빠 엄마와 여행의 설렘을 극대화하면서 알콩달콩하게 같이 준비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몇 주 전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아울렛 투어를 하면서 맛난 음식도 사드리고 콧바람을 같이 쐬면서 이것저것 입어봐라 써봐라 신어봐라 이쁘네 멋있네 추켜세워주며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딸 노릇을 톡톡히 했다. 동생의 준비는 실제 여행하는 내내 매 순간 빛을 발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커플룩을 입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알록달록 커플룩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좀 티격태격하던 부모님이 더 알콩달콩한 느낌이었다. 


집에서 동생이 센스를 담당한다면, 나는 철저함을 담당하는 편이다. 공통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 범위 내에서 '당장 떠날 수 있는' 지역의 여행지와 상품을 꼼꼼히 알아보고, 비교해 보고 예약을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공통적으로 판타지, 로맨스 영화보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훨씬 더 몰입해서 보는 우리 가족은, 목적 없는 휴양보다 탐구와 경험을 좋아기에 구성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중국의 자연경관이 좋다는 어느 한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언어와 치안의 문제로, 개인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 형태의 여행이지만, 여행사 패키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사실, 당장 급박히 떠날 수 있는 옵션은 이미 많지 않았다.


# 현재 부모님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


이미 분가를 한 입장에서 며칠 동안 24시간 내내 붙어 다니며 다양한 환경에 함께 노출되는 기회는 흔치 않다. 아무리 자주 통화를 한다 해도, 아무리 자주 밥을 먹는다고 해도, 그건 우리 삶의 조각조각 단편을 듣고 겪을 뿐이다. 여행을 가면 연속적인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빠가 얼마나 일찍 지치고 잠이 드는지, 하루 종일 담배를 얼마나 피우는지, 엄마가 얼마나 무리하면 왼쪽 무릎이 아파 오는지, 하루 종일 커피는 얼마나 마시고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은 얼마나 되는지 등 소소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환경에 함께 노출되어 보면서, 그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하는 사람인지, 어떠한 부류의 인간이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끼한 음식은 얼마나 잘 드시는지, 낯선 환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엄마는 중국어를 전혀 못함에도 특유의 눈치로 어느 정도 공부를 했던 아빠와 나도 전혀 못 알아듣는 어려운 말을 금방 캐치하고, 상대가 알아듣건 말건 당당하게 필요한 것을 주장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디테일은 신경 안 쓰고 큰 그림에 집중하고, 핵심을 파악하는 직감이 뛰어난 엄마는 그렇게 우리 셋을 남보다 스트레스 덜 받고 키워냈던 것 같다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내가 철저히 준비해 간답시고 아답터, 지사제, 해열제, 얼굴 팩 등등을 온갖 물품을 다 준비해 갔지만, 부모님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하루의 필수템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현지식도 너무 잘 드시고, 굳이 김치나 고추장을 찾지도 않았는데도 유일한 결핍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믹스 커피였다. 패키지에 같이 간 사람들 중, 길게 계속 여행 중이셨던 부부는 필수품으로 아예 봉지커피를 잔뜩 싸와 다들 부러워하기도 했고, 한 입씩 얻어마시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렇게 믹스커피를 하루 밥 챙겨 먹듯이 달고 사시면서 버틴 세대 같았다.


# 미래 우리의 모습에 대한 힌트를 볼 수 있었다 #


누구보다 아빠를 겉과 속으로 빼다 박은 나와, 정 반대로 모든 것이 엄마와 똑같은 여동생.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


집에서는 대부분 과묵하고 딱히 그간 살아온 삶에 대해 늘어놓는 법이 거의 없었던 아빠는, 사실 알고 보면 밖에선 그 누구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양한 경험과 모험, 성취를 삶에서 중요시하고, 실제로 폭넓은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아빠는 어떤 소재의 이야기가 나와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 몰랐던 다양하고 많은 인생 경험을 했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 역시 또래에게는 대충 그런 부류에 가까운 것 같고, 나도 아빠 정도의 나이와 경험이 더 쌓이면 지금보다도 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미래의 모습에 대한 힌트를 얻었으니, 묻지 않은 말에는 자중하는 노력을 특별히 더 기울이며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여동생은 반면, 엄마와 똑같이 잔정이 많고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지만, 독하지 못하고 참을성이 없어서 인내하지 못한다. 배가 고프면 절제 없이 먹어대고, 굳이 산 정상이 코 앞인데도 조금을 더 버티는 것보다 지금 당장의 휴식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결국 엄마는 많은 이 시대의 어머니들처럼 꽤 살찐 그냥 평범한 아줌마 몸매로 늙어가고 있고, 여동생 역시 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타고난 체력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닌 데다, 딱히 독한 성격도 아니니, 끈기와 인내는 각별히 신경 써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 과거가 되어 함께 미소 지을 추억을 나눠 가졌다 #


지금의 아빠는 예전에 내가 알던 사진 찍기 귀찮아하고 싫어하던 아빠가 아니었다. 이제는 오히려 먼저 찍어 달라고, 같이 찍자고도 하고 멋지게 포즈도 잡을 줄 아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아빠도 이렇게라도 순간의 추억을 잡고 싶어 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우리는 같이 이쁜 풍경 앞에서 셀카 놀이도 하고, 평생 다시 오지 않을 남의 나라 산 정상에서 다정하게 포즈도 취하고, 중국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에 똑같이 입 벌리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남들은 별 관심 없었던 것도 나와 부모님은 감동하는 포인트가 같았고, 유달리 호기심 많아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쓰인 글귀들을 열심히 읽어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사 온 붓으로 글을 쓰거나 기념으로 사 온 다기 세트에 차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함께 나눈 추억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티비에서 중국 얘기가 나오거나 황산의 풍경이 비칠 때면 우리는  혼자 미소 짓거나 옆의 누군가와 나눌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함께한 소중한 여행은 이미 아름다운 추억 한 조각으로 변신하여 머릿속 한 공간을 차지하였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자리할 것이다. 여행을 함께 하면서도 여러 상황들에 노출될 때마다 그동안 각자 저장했던 함께 나눈 기억 속의 에피소드들을 꺼내고 다시 한번 나누고, 확인하고 함께 추억에 웃을 수 있었다. 그랬던 장면마저 이제는 더 훗날의 이쁜 추억 한 조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을 벗어나고 나면, 점점 나의 핏줄 가족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력만 된다면 언제고 좋은 추억을 얼마든지 나누고 싶겠지만, 또 각자의 가족들이 더 추가되고 나면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어 배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력이 되면", "시간이 되면", "기회가 되면" 이런 상황은 절대로 그냥 오지 않는다. 여력도, 시간도, 기회도 모두 "굳이 만들어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질 경우에나 겨우 오는 것이다. 


여동생이 잠시 한국 들어온 틈을 타 일주일 만에 급박히 준비한 우리 가족의 중국 여행,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일 년 전, 한 달 전부터 일정 잡고 알아보고 준비하고, 미리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조차 없었다. 준비가 좀 어설프고 미진한 게 있으면 또 어떤가. 사업 고객 접대가 아니라 가족 여행이다. 부족한 게 있었더라도 그 또한 추억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과 정확히 같은 또래이신 부부가 같은 그룹이었는데, 노스페이스로 한껏 무장하셨으나 그리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커오면서 지금까지도 노스페이스는커녕 그보다 낮은 급이라는 메이커도 둘러본 적 없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딱히 결핍을 느끼지도 않았던 것이, 우리에겐 서로가 있었고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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