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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Dec 28. 2019

시대의 경제와 한 집안의 주춧돌이었던 한 남자 이야기

우리들, 그리고 나의 아빠 이야기

아빠는 전형적인 8~9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 역군으로서 온갖 후진국에 파견 나가 외화를 벌어와 국가 경제 부흥에 일조하느라 정작 우리가 가장 귀엽게 재롱떨던 모습을 많이 놓쳤다. 캠코더도 비디오도 너무 비싸고, 유튜브는 원형조차 없던 그 시절, 엄마는 카세트테이프에 우리의 목소리와 재롱, 그리고 그리울 고국의 가요를 녹음해 몇십 일 걸리는 바다 우편에 실어 보내곤 했다. 더운 나라 파견 시절 당시 귀하다는 바나나를 한 상자 귀국길에 선물로 어렵게 가져다준 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비싼 과일은 그때까지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어서, 먹을 줄을 몰라 대부분 썩어 버렸던 것 같다. 아빠가 사다준 조개 목걸이가 난다는 그 더운 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상상이 잘 안 갔다.


# 아빠의 회사 생활 #


역사를 정말 좋아했지만, 사학과는 밥 벌어먹기 쉽지 않다는 어른들의 얘기에 공대를 나온 우리 아빠는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던 중공업 발전소 엔지니어가 되었다. 아무래도 80년대에 발전소를 짓는 일이 선진국보다는 후진국에 수요가 더 많다 보니 방글라데시, 사우디 아라비아 등 당시에는 더욱 험지였던 곳들에 파견 기회가 많이 나왔고, 도전 정신 강한 우리 아빠는 두려움 없이 자원했다고 한다.


초년 시절 군대도 면제받게 될 지경으로 약골이었던 우리 아빠는, 따지고 보면 그때 기껏해야 대리 나부랭이나 되는, 조직의 어린 직원에 불과했지만 해외 파견 중 새까만 얼굴을 한 현지 직원들의 폭동 등에 맞서 목숨을 걸고 회사를 지켜내고, 금고를 사수하는 일도 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좀 더 선진국에 파견 나가는 우아한 문과생이었다면, 우리도 어린 시절 아빠 따라가서 견문도 넓히고 외국어 원어민이 되어 평생 더욱 편한 삶을 누렸을 텐데, 아빠가 가는 곳들은 도저히 어린애들을 달고 갈 수 없는 험지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회사에 입사를 하고 나서 점심시간, 회식 시간마다 아저씨 군단과 함께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하는 시간들이 난 좋았다. 그 자리가 2~30년 전 우리 아빠를 만날 수 있는 시간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차장 부장님들이 자식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마다, 본인은 다 닳아 해진 방석에 앉아 원하는 신발 하나 마음껏 못 사면서도 애들 선물 고민을 하는 걸 보면서 '아 우리 아빠도 저랬겠구나' 싶었다. 물론 그 당시의 근무 환경이란, 아빠가 한국에 있을 때조차도 평일엔 일찍 퇴근한 적 없고 토요일은 무조건 출근이었으며, 어쩌다 쉬는 날이면 시체처럼 잠을 보충해야만 했으니 아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업무 강도를 초월했을 것이다.


# 큰 나무 같은 아빠 #


우리 아빠는 전형적인 갱상도 싸나이로, 말이 많거나 다정다감하거나 한 것들은 남자다움과 거리가 멀다고 배우고 자라왔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말을 하지 않는 데도, 아니 때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더 잘 전달될 때가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안 하든, 한 번도 가타부타 말을 한 적도 없고 묵묵히 지켜봐 주고 온전히 믿어주는 그런 존재.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여느 모범생 아이들처럼 시험 기간이면 늘 독서실을 다니고 늦은 시간 귀가를 하곤 했다. 물론 나도 다른 보통 아이들처럼 아마도 반은 책상에서 졸고, 나머지 반의 반은 친구들과 머리 식힌다는 핑계로 독서실 근처를 쏘다니며 배회하고, 나머지 남는 시간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벼락치기를 하는 데에 보냈다. 그날도 친구와 독서실에서 빠져나와 그 시절의 나름 진지했던 고민들과 스트레스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가, 어느 순간 보니 시간은 너무 늦었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들어가는 길이었다.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유례없이 늦어지자 걱정된 아빠가 나를 찾으러 왔는데, 아까 친구와 황급히 독서실로 복귀할 때에 뒤에서 따라오던 어른이 아빠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빠는 공부한 게 아니라 늦게까지 노느라 안 들어온 딸에게 끝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본 게 없는 냥, '다만 늦어 걱정되어 왔으니, 같이 들어가자'는 말, 딱 그뿐이었다. 나는 그 뒤로 너무 죄송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덜 땡땡이를 칠 수밖에 없었다. 만 21살에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가서 한 달 넘게 혼자 여행하는데도, 전화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며 조금도 걱정하거나 연락하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대들기도 많이 하고 또 간혹 사고를 치거나 실망을 줘서 혼도 종종 나고 맞기도 하며 컸던 동생들과 달리 나는 그냥 알아서 혼자 무탈하게 ‘지 할 일’ 잘해와 별로 입이나 손댈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첫사랑'처럼 '큰 딸' 프리미엄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아빠 회사에서 노트북이라는 것도 휴대폰이라는 것도 복지 차원에서 처음 지급받았었는데, 정작 아빠는 쓰지도 않고 결국 내 것이 되기도 했다.


아빠는 그 시대 많은 아버지들처럼 대체로 가부장적이고, 살갑지 않고, 무뚝뚝한 만큼 책임감도 강한 스타일이다. 자식들 앞에서 평생 딱히 칭찬이나 좋은 감정을 드러낸 적 없지만 뒤에서 친구들에게는 자식 자랑을 빼놓지 않는 보통의 아빠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첫 번째 긴 고비였던 20대 중후반 첫 대학원 시절, 아빠는 변함없이 이른 출근을 하면서 아침마다 문간방에서 자고 있던 나의 얼굴을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 나가셨다. 이 시기가 기억나는 평생 아빠와의 가장 가까운 스킨십이었던 것 같다.


# 아빠의 스타일 #


아빠는 평생 몸과 마음을 바친 직장에서 결국은 임원을 달지 못하고 명예로운 퇴임을 맞이했다. 임원을 다는 것보다 끝까지 가족을 위해서 정년까지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감사의 의미로 퇴직하시던 날, 역대 가장 비싼 선물인 몽블랑 만년필에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 드렸다. (물론 그렇게까지 오기에 엄마의 지분도 엄청났기에 엄마에게도 선물을 했다.) 하지만 당시 아빠는 구체적으로 어떤 심정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잘은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쪽 같은 할아버지를 닮아 정치와 맞지 않는 아빠가 임원을 했었다면 더욱 괴롭고 병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평생 살가움이라든가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받아본 적도 없고, 그래서 낯 뜨겁게 실습해 볼 기회도 시간도 잘 없었던 우리 시대의 아빠들. 그리고 남자라면 감정적이거나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찌질한 것이라고 학습되어 온 가부장적인 문화의 산물들. 나는 제한된 분출구로 인해 허용된 감정 스펙트럼의 운신 폭이 적었던 그들도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내리사랑이나 외사랑의 깊이만큼은 드러내 놓고 꺼내지 못했던 만큼 오히려 더, 마치 장독에 오래오래 묻어두고 진득이 묵혀둔 묵은지처럼 더욱 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공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였고, 대기업에서 부장 정년퇴직을 하였으며, 이후 중소기업의 상무로도 재직을 했다. 여러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아빠는 늘 인복이 많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빠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았던 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감리 자격증을 따서 간간이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탐구를 좋아하는 아빠는 사주 역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태어날 때에 "큰 기쁨"이라는 뜻의 첫 손주 이름을 손수 지어주셨다.


# 아빠에게 딸이란 존재 #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어로 듣다가 눈물을 질질 흘린 "Avoir une fille"(딸이 있다는 것은)이라는 절절한 노래가 있었다. 줄리엣의 아빠가 그녀를 생각하며 독백으로 부르는 노래였는데 번역으로 결코 다 전달할 수도 없는 그 절절한 감정에 소름이 돋았다. 자식을 태어날 때부터 독립적인 별개의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프랑스인들도 우리네 부모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강도의 내리사랑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딸이 있다는 건 작고 소중한 보석을 가진다는 것이고, 그 여인을 알기도 전에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것. 딸은 내 피요 내 그간 삶의 결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죄인이 되면서 또 희생양이 된다는 것. 누가 되든 내 딸을 데려가게 되는 (나쁜)놈의 감언이설은 영원히 듣지 않으리.." 의역을 해서 요약을 하다 보니 유치하게 보이는데 실제로는 낮은 음역의 중년의 배우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표현하는 방식이 약간 다를 뿐 동서고금 딸을 애지중지하며 짝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은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내가 본 모든 영화 장르를 통틀어 다섯 손에 꼽을 정도의 수작이라고 평가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문화적 배경은 멕시코의 전통적인 정서인데, 죽어서까지도 생전 하나 있던 딸이 자신을 잊을까 전전긍긍하고 그 딸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없을까, 혹시라도 사후의 세계에서조차 딸과 엇갈려 평생 재회하지 못할까 오매불망하는, 사자의 세계에서도 맘 편할 수 없는 한 아빠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는 그 딸이 아무리 늙어 백발에 자글자글한 주름, 그리고 이제는 치매로 자신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반송장 노인이 되었음에도  그 아빠에겐 여전히 어린 시절 본인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귀엽고 아련한 예쁜 딸로 보일 뿐이었다.


평생 부모에겐 자식이 몇 살이 되었든 그저 어린아이 일 뿐이라고 들었다. 지금도 우리 아빠는 심지어 손주보다도 내가 더 우선순위이고 내가 여전히 그가 보살펴야 하는 아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모두들 아기 우선, 아이 위주의 관심만 쏠려있을 때도, 혹시라도 내 아이 때문에 내가 힘들지는 않을지 아빠의 걱정스럽고 진심 어린 시선을 뒤에서 느낄 때마다 콧등이 시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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