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 육아가 기본이었던 그 시절
그때 그 시절 우리 엄마들은 어떻게 둘셋을 누구 도움 하나 없이 다 잘 키워냈을까? 굶기지만 않으면 다 알아서 큰다고 했던 그 예전 시절이 아니라, 여자 어린이는 피아노, 남자 어린이는 태권도가 필수가 된 지 오래이고, 갖은 학습지에 선행 학습이 이미 창궐하던 그 시절. 아빠는 많은 경우 중동이나 동남아 중공업 건설 현장에 나가 있느라 한국에 없거나, 한국에 있어도 저녁 한 번 같이 먹기 힘들었으니 육아는 그야말로 오롯이 엄마 전담이었다. 나도 애 키우는 나이가 되어 보니, 할머니나 친척 등 지척에 잠시 애 맡길 데도 하나 없이 셋을 혼자 어떻게 키웠을지, 엄마가 더 대단해 보였다. 그래도 돌이켜보건대 엄마는 애 셋을 홀로 육아하며 나름대로 시간을 쪼개 다양한 취미생활도 하고, 각종 지역사회 감투도 써 가면서 잘 감당했던 것 같다.
# 추억의 만두 가게 #
8살, 5살, 4살짜리 애 셋을 데리고 혼자 시장 한 번 가려면 전쟁일 것이다. 복잡한 시장통에서 양손으로도 다 감당 안 되는 애들을 자칫 잃어버리기도 쉽고, 여기저기 보이는 대로 이것 사달라 저것 사달라 조르는 통에 필요한 물건 하나 집어 오는데 하세월이요, 원하는 것을 다 담기도 전에 지쳐 버릴 수도 있다. 우리 엄마는 아예 그런 어려움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시장 초입에 있는 만두 집에 제일 먼저 들러, 셋이서 사이좋게 먹고픈 만큼 원껏 먹고 있으라고 일러두고는 잽싸게 장을 봐 오는 방법을 썼었다.
엄마는 산만하게 다른 것에 주의가 흐트러질 새 없이 재빠르게 볼 일을 보고 돌아와, 그 사이 우리가 먹은 것을 한 번에 계산하고는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간혹 지겨워지면 만두집이 떡볶이 집으로 대체될 때도 있었던 것 같지만, 대체적으로 당시 만두집이 덜 복잡하여 안전하고, 상대적으로 메뉴도 많아 시간 끌기가 좋았던 것 같다. 나는 당시 만두를 너무 실컷 먹은 탓에 물려서, 커서는 꽤 오랜 기간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고, 지금도 잘 먹지 않는다.
그래도 그 당시 배달 주문 앱도, 애들 손 붙잡아줄 아빠도 부재한 상황에서 엄마의 장보기는 엄마의 요령만큼 수월했다. 물론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서는 애들만 놔두고 어디를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아마 엄마는 다른 시대에 태어났어도 그 시대에 걸맞은 융통성을 발휘했을 것 같다.
# 엄마의 취미 생활 #
외벌이 빠듯한 살림이라도 찌들어 살기보다는 엄마는 그래도 스스로의 취미 생활도 소소하게 놓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꽃을 여전히 좋아하고, 30년 전에 산 화분도 거대한 나무로 키워서 이사 갈 때마다 데려 오는 등, 집에 한 번 들어온 식물은 어떻게든 죽이는 법 없이 키워 내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손을 가졌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우리 셋을 키우면서 우리가 학원 간 틈을 이용해 지역 사회의 여러 기회를 활용하여 큰돈 들이지 않고 꽃꽂이, 서예, 지점토 공예 등을 짬짬이 배웠던 것 같고, 나중에는 이왕이면 가계에 도움 되는 것을 배우겠다며 아예 재봉틀을 사서 커튼이며 우리 옷들을 세트로 만들어 입히곤 했었다. 지점토 공예도 이왕이면 바자회 같은데 판매를 하고자 집에서 잔뜩 만들면, 일찍이 옆에서 어린 여동생이 색칠하는 것을 거들다 오늘날의 화가라는 직업으로 이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꼬꼬마 셋을 키우는 중간에 운전면허를 땄었고, 날씨 좋은 날이면 셋을 싣고 자연경관 좋은 근교에 나가 우리를 모델 삼아 인물과 풍경이 어우러진 작가 못지않은 사진 작품을 많이 남겨 주었다. 나는 엄마와 애초에 매우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 평생 생각해 왔는데, 지금 보니 결국 나의 취미 활동은 근 2년째 꽃꽂이요,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개인의 자그마한 활동은 한국의 풍경 사진을 꾸준히 찍어서 공유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 큰 그림에만 집중하기 #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책을 적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장의 단계마다 시의 적절한 가내 책 공급이 원활했었기 때문이었다. 테마별 전집은 항상 집안 가득했고, 전집을 거의 다 한 번씩 대충은 읽었다 싶으면 어느새 새로운 시리즈로 교체되어 있었다. 사실 잔뜩 몇십 권이 집에 새로 들어오면 나는 호기심 반, 아까워서 반의 마음에 열심히 읽어댄 것과 달리, 동생들은 일단 활자 책에 큰 관심이 없었고, 나만큼 의무감도 느끼지 않아 거의 읽은 경우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한 번도 누구에게든 억지로 강요하거나 읽었는지를 닦달하면서 확인한 적은 없던 것 같다. 만일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면 아마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아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을 하면서도 늘 단백질은 매 끼 챙겨야 한다며 아침은 생선, 저녁은 육고기라는 종목을 거의 꼬박꼬박 올렸지만, 대단히 다양한 조리법이나, 유기농이랄지 고급 식재료 등 추가적 디테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식재료든 옷이든 쇼핑을 할 때에도 기준은 '가성비'도 아니고 늘 '가격' 하나만 보고 골랐기 때문에 고민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의 맛은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 조미료가 다 했던 것 같고, 사실 위생도 까다롭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덕으로, 거의 결벽증에 가깝게 위생을 철저히 신경 쓰고 키운 시어머니의 귀한 아들은 조금만 뭘 먹어도 탈이 나는 동안, 나는 같이 뭘 먹어도 탈 한 번 난 적이 없다.
이 부분은 훗날 일본 의사가 쓴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통해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었는데, 적당히 더러운 환경에 어릴 때 노출된 사람이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 확실히 평생 탈도 덜나고 세균 감염에도 강하다고 한다. 그 책을 통해, 적당히 대충 살 수 있게 하는 '둔감력'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원래도 사소한 것에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닌 엄마가 애 셋을 키우면서 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둔감력도 스스로 더욱 강화시키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한다.
# 행운이 따르는 사람 #
우리 엄마는 경품 행사 등에 빠지지 않고 참 당첨 잘되는 사람이다. 어디든지 가서 추첨을 하면 매번 1등처럼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꼭 뭐라도 하나 걸려 오고, 빈 손으로 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선풍기, 믹서기를 포함한 이런저런 살림들이 꽤나 채워졌다. 나는 '원래 잘 되는 사람만 맨날 되는 거지.'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이나 걸리는 거지, 어차피 그런 건 내 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살면서 거의 응모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훗날 내가 이벤트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의외로 꽤 얻어걸리게 되면서 다시 잘 생각해 보니, 엄마가 종종 당첨이 되었다며 이것저것을 얻어온 비결이 갑자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추첨이나 경품 행사라도 일단 무조건 다 응모를 하고 보는 것이었던 것이다. 내가 속된 말로 '짜치다'며 무시한 동네 주민 행사부터, 사지도 않을 물건이라도 프로모션 경품 추첨 행사에 지나가게 되면 '뭔가 하나는 될 거야'라며 행운권 추첨이 끝나도록 꼭 끝까지 기다렸다. 다른 행사에 가 봐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중간에 가버려 그 행운이 남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상당히 보게 되는데, 엄마는 그렇게 '남이 버린 행운조차 얻어걸릴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엄마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응모 횟수'가 많고, 혹 안 되는 경우라도 크게 괘념치 않지만, 대신 당첨되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는 역시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야'라며 자기 암시를 강화하는 요소로 활용했다. 사실 그런 경품 추첨이라는 것은 정말로 랜덤 하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당첨 횟수'를 올리는 방법은 절대적인 '응모 횟수'를 올리는 방법밖에 없다. 엄마는 늘 바지런함으로 행운을 ‘사’ 왔고, 또 그 행운에 대해서 행복해할 줄 알았다. 낙천적이고 부지런한 우리 엄마는, 사실 스스로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 초긍정의 힘을 기반으로, 힘들고 지치는 애 셋 독박 육아도 큰 탈 없이 무사히 완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