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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May 22. 2020

애 셋 독박에도 과하게 스트레스받지 않은 엄마의 비결

지혜만큼 중요한 둔감력

예전 엄마들은 애 여럿을 혼자 어떻게 키워냈을까. 아빠는 많은 경우 그 당시 수출산업 역군으로서 중동이나 동남아 중공업 건설 현장에 나가 있느라 한국에 없거나, 한국에 있어도 저녁 한 번 같이 먹기 힘들었다. 당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야근 아니면 회식 러시에 일요일 하루 쉬는 날이면 종일 자는 것으로 한 주의 피로를 푸는 전형적 그 시대 직장인이었다. 직장 생활 시작해보니 당시 아빠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알겠고, 애 키우는 나이가 되니 할머니나 친척 등 지척에 잠시 애 맡길 데도 하나 없이 셋을 혼자 어떻게 키웠을지 엄마가 대단해 보였다. 그래도 돌이켜보건대 엄마는 생각보다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고 육아하며 나름대로 다양한 취미생활도 하고, 각종 지역사회 감투도 써 가면서 셋을 잘 감당했던 것 같다. 나도 엄마의 신박한 능력을 조금이라도 이어받아 발휘할 수 있을까?


1. 추억의 만두 가게


8살, 5살, 4살짜리 애 셋을 데리고 혼자 시장 한 번 가려면 전쟁일 것이다. 복잡한 시장통에서 양손으로도 다 감당 안 되는 애들을 자칫 잃어버리기도 쉽고, 여기저기 보이는 대로 이것 사달라 저것 사달라 조르는 통에 필요한 물건 하나 집어 오는데 하세월이요, 원하는 것을 다 담기도 전에 지쳐 버릴 수도 있다. 우리 엄마는 아예 그런 어려움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 시장 초입에 있는 만두 집에 제일 먼저 들러, 셋이서 사이좋게 먹고픈 만큼 원껏 먹고 있으라고 일러두고는 잽싸게 장을 봐 오는 방법을 썼었다. 엄마는 나처럼 느려 터지거나 다른 것에 주의가 흐트러짐 없이 재빠르게 볼 일을 보고 돌아와 그 사이 우리가 먹은 것을 한 번에 계산하고는 여유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간혹 지겨워지면 만두집이 떡볶이 집으로 대체될 때도 있었던 것 같지만, 대체적으로 당시 만두집이 덜 복잡하여 안전하고, 상대적으로 메뉴도 많아 시간 끌기가 좋았던 것 같다. 당시 너무 실컷 먹은 탓에 물려서 커서는 꽤 오랜 기간 만두를 입에도 대지 않았었던 기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 배달 주문 앱도, 애들 손 붙잡아줄 아빠도 부재한 상황에서 엄마의 장보기는 요령만큼 수월했다.


2. 엄마의 취미 생활


외벌이 빠듯한 살림이라도 찌들어 살기보다는 엄마는 그래도 스스로의 취미 생활도 소소하게 놓지 않으려 한 듯하다. 지금도 꽃을 여전히 좋아하고, 30년 전에 산 화분도 거대한 나무로 키워서 이사 갈 때마다 데려 오는 등, 집에 한 번 들어온 식물은 어떻게든 죽이는 법 없이 키워 내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손을 가졌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는 우리 셋을 키우면서 우리가 학원 간 틈을 이용해 지역 사회의 여러 기회를 활용하여 큰돈 들이지 않고 꽃꽂이, 서예, 지점토 공예 등을 짬짬이 배웠던 것 같고, 나중에는 이왕이면 가계에 도움되는 것을 배우겠다며 아예 재봉틀을 사서 커튼이며 우리 옷들을 세트로 만들어 입히곤 했었다. 지점토 공예도 이왕이면 바자회 같은데 판매를 하고자 집에서 잔뜩 만들면, 일찍이 옆에서 어린 여동생이 색칠하는 것을 거들다 오늘날의 화가라는 직업으로 이끌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꼬꼬마들을 키우는 중간에 운전면허를 땄었고, 날씨 좋은 날이면 셋을 싣고 자연경관 좋은 근교에 나가 우리를 모델 삼아 인물과 풍경이 어우러진 작가 못지않은 사진 작품을 많이 남겨 주었다. 나는 엄마와 애초에 매우 다른 성향의 사람이라 평생 생각해 왔는데, 지금 보니 결국 나의 취미 활동은 근 2년째 꽃꽂이요,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개인의 자그마한 활동은 한국의 풍경 사진을 꾸준히 찍어서 공유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3. 큰 그림에만 집중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책을 적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장의 단계마다 시의 적절한 가내 책 공급이 원활했었기 때문이었다. 테마별 전집은 항상 집안 가득했고, 전집을 거의 다 한 번씩 대충은 읽었다 싶으면 어느새 새로운 시리즈로 교체되어 있었다. 사실 잔뜩 몇십 권이 집에 새로 들어오면 나는 호기심 반, 아까워서 반의 마음에 열심히 읽어 제끼는 것과 달리, 동생들은 일단 활자 책에 큰 관심이 없었고, 나만큼 의무감도 느끼지 않아 거의 읽은 경우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한 번도 누구에게든 억지로 강요하거나 읽었는지를 닦달하면서 확인한 적은 없던 것 같다. 만일 매사에 그런 식이었다면 아마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아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을 하면서도 늘 단백질은 매 끼 챙겨야 한다며 아침은 생선, 저녁은 육고기라는 종목을 거의 꼬박꼬박 올렸지만, 대단히 다양한 조리법이나, 유기농이랄지 고급 식재료 등 추가적 디테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의 맛은 생각해보면 많은 경우 조미료가 다 했던 것 같고, 사실 위생도 까다롭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덕으로, 거의 결벽증에 가깝게 위생을 철저히 신경 쓰고 키우신 시어머니의 귀한 아들은 조금만 뭘 먹어도 탈이 나는 동안, 나는 같이 뭘 먹어도 탈 한 번 난 적이 없다. 이 부분은 일본 의사가 쓴 책을 통해 훗날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었는데, 적당히 더러운 환경에 어릴 때 노출된 사람이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 확실히 평생 탈도 덜나고 세균 감염에도 강하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일본인 의사가 썼다는 책,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를 보고서야, 우리 엄마가 애 셋을 그야말로 독박으로 평생 키우면서도 본인 스스로 크게 스트레스받거나 과도하게 힘들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적당히 대충 살 수 있게 하는 '둔감력'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알게 되었고, 원래도 사소한 것에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닌 엄마가 애 셋을 키우면서 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있던 둔감력 스스로 더욱 강화시키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한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엄마가 셋을 혼자 키우고 잘 버틸 수 있었던 주요 힘은 1)지혜와 2)바지런함, 그리고 3)적당한 둔감력이라고 생각된다. 이 중 내가 자신 있는 것은 바지런함 하나뿐 인 것 같다. 하지만 만일 애 셋을 혼자 키우는 상황이라면 그 정도까지 바지런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또, 둔감력 부분은 일단 나는 성향상 상당히 센서티브 하게 타고난 측면이 있어 정말 자신 없는 부분이고, 지혜 부분은 글쎄.. 상당한 내공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결론은 나는 그럴 생각도 아예 없지만 애 셋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라는 것이고, 돌이켜보니 엄마는 대단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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