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꿈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일제강점기 어느 숨어 지내는 시기에 나는 살고 있었다. 그중에 슬프고 아파 힘겨워 보이는 한 여인이 '나는 어차피 더 이상 안 되겠으니, 나를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계속 가던 피난길을 이어 가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직감적으로 당시 그것은 생생한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하였고, 지체할 여유 없이 살기 위해서는 계속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은 우리가 떠나기 직전, "그래도 오늘은 내가 태어난 날과 같은데 축하는 받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 여인을 따뜻하고 크게 꽈악 끌어안으면서 '그간 얼마나 힘들게, 그리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는지 나는 잘 안다'고 또박또박 천천히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 눈을 깊게 들여다본 순간,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우리 할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진심 어린 말에 눈물을 흘린 것은 그녀였을까, 나였을까, 아님 둘 다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그렇게 '인생의 위로'를 받은 듯하였다.
깨자마자 드는 생각은 "조상이 꿈에 나오면 보살핌을 받는 스토리라던데, 내 꿈에 최초로 나온 조상, 이미 수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를 보듬어주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보듬어줘야 하는 대상이라 생각했다니 이런 맹랑하고 당돌한 꿈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우리가 생전에 정말 더 보듬었어야 하는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게 사실에 더 가까웠다.
# 친가 쪽 할머니 이야기 #
평생 문맹인 채 그것을 지혜로 상쇄하며 오롯이 버텨온, 꽃다운 나이에 일제시대를 한국과 일본에서 겪으면서 허리가 굽어지도록 평생 노동만 하고 살아온 인생. 종갓집 장손 며느리로 찍소리 한 번 원대로 못해보고, 6남매를 낳고 한 번도 제대로 몸조리도 없이 논밭일 하다 평생 꼽추처럼 굽은 등으로 눈치 보며 산 기간이 훨씬 긴 한스러운 삶.
오죽이나 힘들었으면 그 시절에도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 모두를 뒤로하고 농약을 먹고 죽으려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하나, 그 이후로도 할머니는 반백년을 넘게 그렇게 힘들게 살아내셨다. 내가 감히 전부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할머니의 고된 인생과 힘겹게 살아온 날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고 꿈을 빌어서나마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드린 신발을 무척이나 아꼈다는 말을 후에 둘째 고모에게서 전해 들었는데, 그 신발은 나중에 보니 거의 새것으로 남아있었다. 할머니는 매년 엄마가 명절 때마다 옷을 사다 드리면, 그걸 손도 안 대고 고이고이 모아놨다 '불쌍한 사람들에겐 좋은 새것을 줘야 한다'며 한 번 입지도 않고 나눠주곤 했다는 세상 천사 같은 여성이었다.
# 외가 쪽 할머니 이야기 #
양가 모두 당시 대다수의 서민층과 같이 흙수저 혹은 무수저급의 형편이었는데, 외할머니의 인생도 역시 기구했다. 외할아버지는 깊은 산골 마을에서 아픈 사람들을 종종 치료도 해주고, 동네 우물도 여기저기 파주며 나름대로 리더십을 발휘하셨던 것 같은데, 전쟁이 터지고는 징집을 당하지 않기 위해 깜깜한 굴을 파고 들어가 꽤나 오래 숨어 지내셨던 것 같다. 당시 전기도 거의 없던 시절, 전쟁통에 산짐승이 드나드는 껌껌한 산굴 속에서의 생활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드셨는지, 이후 세상으로 나오신 다음, 멀리서 오는 열차를 보고는 '꽃상여가 온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걸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그것이 우리 엄마의 기억에도 잘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굽이굽이 시골길을 찾아 들어가, 건너편 뱃사공을 소리쳐 불러 강을 건너야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산골 마을에서, 외할머니는 그렇게 일찌감치 딸 셋을 부양해야 하는 과부가 되었다. 일굴 논도 밭도 없는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멀리 산 몇 리를 넘어 밭일을 하러 가거나 산나물 등을 캐거나, 송아지를 키워서 새끼를 낳고 장에 내다 파는 일을 반복하는 일 정도였다. 할머니가 생전에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아이고 이 밤이 없었으면 우째 살았을 끼고. 밤이라도 있으니 이래 쉬제."였다. 일찌감치부터 외롭고 고된 삶을 버티기 위해 담배와 소주를 끼고 사셨던 것 같기도 하다.
막내였던 엄마를 가장 이뻐해서 어린 시절 어디든 업고 다니셨고, 어디서 귀하게 사탕이라도 얻어오게 되는 날이면 누구에게 빼앗길 새라, 자고 있던 엄마를 깨워서라도 엄마에게 먹으라고 줘 사탕을 물고 잔 엄마는 아침이면 끈적이가 머리까지 엉켜 붙어 난리였다고 한다. 그 시절 충치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할머니에게 교육을 해줄 사람이나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60-70년대 시절을 재현해 놓은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여동생과 나는 너무 신기하고 좋아했던 반면, 엄마는 묻어뒀던 그 가난했던 시절, 차갑고 껌껌한 방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몹시 불쾌해했다. 좋지 않은 옛 시절의 소환은 추억이 아니라 트라우마일 뿐이었다.
#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
외가 쪽 할아버지는 엄마에게조차 기억에 없기 때문에 쓸 것이 없지만, 친가 쪽 할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꼬장꼬장 대쪽 같은 성격으로, 그야말로 무수저에서 시작해서 고유의 근면함과 추진력으로 말년에는 그 동네에서 땅 부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성과를 쌓으셨다. 그렇게 되어서까지도 끝까지 본인은 정말 한 푼 안 쓰고 아껴 쓰면서 모으기만하며 살다 가셨기에 부자로서의 삶은 '단 하루도' 제대로 누린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셨었다고 들었다. 할머니와 갓 결혼해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셔서 택시 운전사를 했다는데, 당시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 얼마나 심한 핍박과 고초를 겪었던 것인지, 아니면 택시 운전을 하시다가 큰 사고가 있었는지, 집에 불이 난 것인지, 무일푼으로 한국으로 귀국한 뒤로는 단 한 번도 운전대를 잡은 적이 없다고 한다.
"내가 너희 자식을 너무 이뻐하는 티를 내면 큰 집에서 서운해할 것 같아 일부러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며 엄마에게 미리 속 깊은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였고, 그 시대 특유의 가부장적인 사상이 많았음에도 "둘째 며느리(엄마)도 한번 의견을 말해봐라. 종종 사리에 맞는 말을 많이 하드라."며 중요 대소사에 일개 며느리들의 의견까지 청취하는 모습도 보여주신 할아버지였다. 허약했던 아빠를 군 면제 시키기 위해 쌀을 가마니로 짊어지고 양산에서 부산까지 내려가서 담판을 지었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 들었다.
최근에 예전 부모님 결혼사진을 보면서 당시 할머니들이 나의 지금 나이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요즘은 50대에도 젊디 젊은 사람들 천지인데, 사진 속의 그들은 당시에 이미 '쪼글쪼글한 할머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이 더 흩어지기 전에 글을 남겨두고자 하며, 꿈에서 언젠가 다시 뵐 수만 있다면 온마음으로 다시 한번 깊고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전하고 싶다.
"늘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못다 누린 그 몫까지 잊지 않고 책임감 있게, 멋지게 살아 낼게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