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아리움이 가기 싫은 우리 아빠#
"아빠, 우리 밥 먹고 같이 아쿠아리움 가자~!" 아빠의 몇 년 전 생신에 부모님을 모시고 셋이 아쿠아리움을 갔을 때에 아빠와 엄마는 너무도 신기해하며 한참을 즐겁게 구경했던 터라, 심지어 이뻐 죽겠는 손자와 같이 가자고 하면 당연히 이번에는 더 좋아할 줄 알았다.
"아니 뭐.. 저번에 구경도 했고 그냥 너네끼리 다녀와라." 의외의 대답에 눈치 빠른 사위가 얼른 거짓말을 한다. "아, 할인가로 이미 표를 다 끊어놨어요. 안 가면 손해입니다." 머뭇거리던 아빠는 "아.. 그런 거면 가야지. 손자랑 같이 나들이 가면 나야 좋긴 하지.." 하는 그 눈빛에서 설렘이 스치는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아빠는 아무래도 그 찰나에도 이미 가본 아쿠아리움에 굳이 또 지불할 입장권 값이 아까운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거짓말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뒤에서 얼른 급히 예매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자마자 손자의 유모차를 계속 끌고 다닌 것도,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아기 눈높이에서 일일이 설명을 해준 것도, 내 새끼의 마스크가 벗겨졌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도 아빠였다.
#집밥 순이 우리 엄마#
아쿠아리움을 나와서도 또다시 집에 가서 밥을 해 먹자는 부모님 손을 이끌고 굳이 IFC 몰로 갔다. 엄마와 아빠는 연신 "이곳에 이런 삐까뻔쩍한 몰이 있는 줄 몰랐다."며 마치 서울 구경 올라온 시골 쥐들처럼 두리번거리셨다. 딱히 예약도 안 했고, 설날 용돈에 아쿠아리움 구경에 또 마냥 부담스러워할 부모님의 스케일을 감안함과 동시에 유모차가 정박할 널찍한 공간이 필요하여 지하 푸드코트로 갔다.
엄마는 시킨 메뉴가 나오자마자 이게 양이 왜 이렇게 많냐고 난리이다. "고등어가 오천 원이라고 쓰여 있어서 제일 싼 거 같아 시켰는데,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게 맞나"하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엄마, 이곳에서는 그런 가격의 밥은 팔지 않아. 아이스크림 한 덩이만 시켜도 그 정도 하는데..' 찌개 세트에 고등어 한 마리 추가 값이 그렇다는 것을 엄마는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고작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는데도 엄마는 "너희들 덕에 이런 곳도 와보고 고맙다."고 한다. 이곳은 내가 여의도 직장 생활을 할 때에, 배부른 동료들이 구내식당이 지겹다며 거의 점심때마다 가자고 해 제 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던 곳이다. 무려 7~8년 전 그 당시에도 후식 커피 한잔 값도 오천 원이었다. 나도 매일 늦은 퇴근을 하고는 또다시 여의도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굳이 주말에 다시 올 리는 만무했다지만, 생긴 지 10년 넘은 이런 곳이 여태 있는지도 몰랐다니 좀 충격이었다.
#어떤 우아한 취향의 할머니 이야기#
"오늘 저의 70번째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친지들을 초대해서 축하를 해준다고 하여 기쁩니다. 저를 위해 파바로티의 '오 솔레미오'를 듣고 싶어요." 어느 날 아침, 운전을 하는데 라디오에서 들린 신청곡 사연이었다. 동시에 무수한 생각이 들었는데 대략 세 가닥으로 압축되었다.
(1) 저 나이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든든히 있고, 자신에게 오 솔레미오를 선물할 줄 아는 정신적 여유와 우아함이 있는 삶이라면, 그의 인생은 직업 돈 등과 무관하게 성공한 멋진 삶이다. 나도 저런 할머니로 늙고 싶다.
(2) 늘 70이 마치 매우 가까운 것 같이 생각했었는데, 따지고 보면 내가 겪은 삶의 길이만큼 고대로 한 번 더 돌아야 오는 기간이다. 특히 별 자아의식 없이 기억도 안나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더 긴 시간이 내게는 그래도 아직 있는 것이다. (단, 딱히 중간에 큰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3) 시부모님은 이미 칠순을 몇 년 전에 다 지났고, 우리 부모님도 몇 년이 채 안 남았지만, 그들과 저분은 같은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진짜 '같은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삼십 대에 기를 쓰고 내 젊음과 그간의 모든 재산, 그리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 컬럼비아 대학교로 MBA 유학을 갈 때까지도, 우리 부모님과 친가 외가 통틀어 우리 집안사람들은 그런 학교가 존재하는 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외국 교환 학생을 간 것도 내가 최초였고, '돈이 많이 든다고 듣기만 했던' 미국 유학이라는 것을 가본 것도 내가 유일했으며, 그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 내가 얼마만큼의 금전적인 투자를 했는지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분들이 '파바로티'든 '오 솔레미오'든, 어디선가 들어는 봤겠지만 생일을 맞이하여 본인을 위해 듣고 싶은 구체적인 곡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해서 취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오페라를 나름 즐긴다고 하던 내가 지겹다고 생각한 이태리어 오페라를 같이 간 엄마는 '스토리도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며 흥분했고, 극적이나 비주얼적 요소가 아예 없는 성악 공연을 함께 가서도 아빠도 엄마도 그리 좋아할 줄은 몰랐다. 그들이 이전에 갖지 못한 기회를 누리고 사는 나는, 그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나의 세상에 대한 감사와 동시에, 사회적 빚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매번 해보게 된다.
#강남 부자 말고 강남 거지 이야기#
강남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두 부류가 있다. 강남 신세계 백화점에서 50만 원짜리 옷을 사는 사람과, 같은 고속터미널역 지하상가에서 5천 원짜리 옷을 사는 사람. 나는 늘 후자, 소위 강남 거지였다. 여고시절 친해지고 싶어서 쉬는 시간마다 매점을 같이 가자고 다가오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늘 '매점 가기 싫은 아이'였다. 고맙게 다가와준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친구들보다도 부모님에게 미안하기가 훨씬 더 싫어 차라리 외로워지는 쪽을 택했다.
매일 하굣길을 무려 40분씩 걸으며, 베스트 프렌드와 수다로 수험생 스트레스도 덜고 운동도 하며 당시 용돈의 큰 부분도 아꼈다지만, 그러느라 하나밖에 없던 내 구두는 밑창이 닳아 비가 오면 발이 젖었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그 한 개로 졸업 때까지 잘 버텼다. 외벌이 뻔한 살림에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아끼면서 우리 셋을 키우고 있는지는 장녀인 내가 누구보다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매년 명절마다 시골에 내려가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 분명히 저번에도 내가 양말을 사준 것 같은데, 늘 아빠의 뒤축에는 해진 흔적이나 구멍이 목격되었다.
늘 "다른 건 몰라도 공부하는 데에는 빤쭈를 팔아서라도 다 지원해 주니 공부는 얼마든지 해라."던 아빠는, 결국 평생 평범한 직장생활만으로 애 셋을 모두 심지어 외국물도 한 번씩은 먹어본 석사로 만들었다. 그것은 온 식구가 메이커 옷 또는 신발을 산다거나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거나 하는, 남들에겐 평범할지도 모르는 소소한 사치를 포기한 오랜 삶과 맞바꾼 것이었다.
공부에 좋은 환경이라는 그 동네에서의 삶은, 그만큼 더 많은 것을 희생하고, 더 큰 상대적 빈곤감을 견뎌야만 영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오랜 생활 습관은 이후에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나 역시 연봉의 앞자리가 여러 번 바뀌어도 소비 생활은 여전히 좀처럼 지하상가를 벗어나 지상의 백화점으로 올라올 일이 잘 없다. 당장의 근로소득이 있는 상황이건 아니건, 생신이라고, 반찬 해줬다고, 명절이라고 몇십 만원씩 손사래를 물리치고 꼬옥 쥐어 드리고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빠, 엄마에겐 아쿠아리움도 외식도 사치 생활의 일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법#
나는 옷은 여전히 유명 브랜드를 사진 않아도 이제는 가끔은 좋은 것도 먹거나 볼 줄 아는 여유가 생겼지만, 삶이 나보다 훨씬 덜 남았을 부모님은 아직도 여전히 그런 삶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내가 사는 삶은 어린 시절 대비 조금 더 넓어지고 넉넉해지는 동안에도,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 사이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용돈을 얼마를 쥐어드린들 일시적으로라도 그 세상이 쉬이 바뀔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짬짬이 그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초대하는 일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아기 돌잔치도 요즘 핫하다는 한옥 스튜디오에서 양가 부모님을 초대해 다 함께 한복을 입고 추억을 만드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아기 돌맞이를 기념한 가장 큰 나의 프로젝트 역시, 그들이 이뻐 죽는 손주의 아기 성장 앨범에 그들과 함께한 사진을 간간이 담은 포토북 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후에 아이가 좀 큰 다음에는,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손주와 함께하는 일본 여행을 기획하여 초대하기도 했고, 이후 모두가 담긴 여행 포토북도 기념으로 만들어드렸다.
워킹맘이자, 업무 강도 최상의 업종에서 일하는 와중에 '다시는 할 수는 없을 정도로' 품이 상당히 드는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간간이라도 그들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 초대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