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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물고기 Feb 13. 2023

우리 시대 둘째 딸들을 생각하다

요즘 아이들 말고 우리 세대 이야기

내가 볼 때 오늘날 시어머니의 최고 베스트 프렌드는 둘째 시누이다. 어제도 초등, 중학생인 아이 둘을 놔두고 주말에 적적하고 귀찮은 어머님을 위해 여수에서 광주까지 오후에 다녀갔단다. 같이 간단히 점심 먹자며 카레도 만들어주고, 머리도 직접 염색해 주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종알종알 늘어놓다 돌아가고 나니 또 적막한 오후가 되어 벌써 빈자리가 서운하다고 하신다. 하루에도 한번 이상은 꼭꼭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얘기도 매번 늘어놓는 듯했다.


그 딸은 어린 시절, 첫 아이인 첫째 시누이, 그리고 금쪽같은 막내아들인 우리 남편과는 달리 돌 사진 한 장도 남겨 주지를 않아 내가 주워온 아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커왔다고 한다. 빠듯한 공무원 외벌이 살림에 아들에게만 원기소(영양제인 듯)라는 것을 챙겨주었다는 서러움을 딸은 오래도록 기억하는데, 시어머니는 기억조차 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딸이 멀지 않은 곳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살가운 매일의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오십 줄을 바라보는 오늘날에조차 여전히, 시어머니는 명절만 되면 딸들 몰래 아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과일과, 2박 3일간 손수 공들여 재워놓은 돼지갈비를 통째로 다 바리바리 싸 주신다. (딸들은 식구가 훨씬 많아 먹을 사람들이 많고 우리는 많이 줘도 다 먹기도 힘든데 말이다.)


우리 집이라고 시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갓 들어가고 막내 남동생이 서너 살쯤 된 어느 날, 해외 파견을 간 아빠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 어린애 셋 독박 육아가 엄마 혼자 도저히 감당이 안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우리는 다 같이 시골에 혼자 계신 외할머니댁에 놀러 갔었고, 며칠 후에 집에 돌아갈 때는 여동생을 태우지 않고 엄마, 나, 남동생만 차에 타버린 것이다. 그때 갑자기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울며 뛰어 좇아오던 여동생의 모습이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선명히 생각이 난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무서웠을까. 나는 동생이 너무 불쌍하고 미안해서 돌아가는 버스에서 혼자 소리 죽여 내내 울었다. (엄마는 아직도 모른다.) 첫째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니 챙겨봐야 하고, 막내는 항상 상대적으로 가장 어리니 다 챙겨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버거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라 생각은 충분히 하지만, 그 버거운 상황이 된 것은 둘째 딸들이 성별을 잘못 택해서 태어난 탓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세대에 아주 흔한, ‘딸 둘에 아들 하나’의 구성. 그 유명했던 <응답하라 1988>에서도 그 시대의 전형적인 가족 구성으로 그렸던 그 조합. 나는 그 집들의 두 번째 딸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들 낳으려고 했는데 네가 딸이라서 결국 (남)동생까지 더 낳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들 하는 말. 나는 그런 소리를 듣는 둘째가 아닌 첫째로 우연히 태어났지만, 옆에서 듣기에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말인지에 대해서 늘 생각한다. 그때 내가 원한 것은 사실 네가 아니어서 실망했다니. 혹 그 말이 아무리 사실이었다고 한들 그렇게 꼭 얘기해야만 했을까?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도 내가 다 분한 감정이 드는데,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당당히 말하는 그 무정함, 그리고 그 무심함에 대해서 나는 근 40년이 되도록 옆에서만 들었음에도 도저히 무덤덤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들은 살면서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뭔가 판단을 하기도 전인 너무 어릴 때부터 아무렇지 않게 들었던 말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보기에는) 크게 괘념치 않는 듯 보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내가 만났던 ‘그런 집의’ 둘째 딸들은 그 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효녀였고, 가장 살뜰하게 커갔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배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첫딸과 막내 남동생 틈바구니에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고 이쁨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타이밍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연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사회에서도 눈에 띄게 센스가 있고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싹싹한 경우는 둘째 딸일 때가 신기하리만치 많았다. 언니는 대들면 안 되고 동생은 양보해야만 하는 매일이 억울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넉넉한 마음씨까지 어쩔 수 없이 단련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의 둘째 딸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조그마한 고사리 손으로 엄마 설거지를 많이도 도와주어서인지 손이 작고 못난 채 컸다. 커서도 엄마의 화장품이며 옷가지, 아빠의 패션을 챙겨주는 것은 거의 둘째 딸의 전담 파트나 다름이 없다. 누구도 잘 챙겨주지 않은 채 알아서 커야만 했던 그들이라 ’누군가가 챙겨준다는 것‘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중요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서일까? 원래 기부도 너무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비슷한 세상에 살거나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들이 더 많이 하듯이, 상대적인 설움을 많이 겪어본 둘째 딸들이 그 누구보다 상대적인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인간으로 커올 확률이 높았던 것일까?



어릴 때 크고 작은 병치레를 겪어본 아이들이 커서도 면역력이 훨씬 더 강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작은 경험들도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겨 좋은 경우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경우 평생 세상을 비뚤게 보는 렌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만났던 센스 넘치는 둘째 딸들은 배려심 넘치는 멋진 여성으로, 비뚤어지지 않고 다들 너무도 잘 커 주었다. 원하는 것을 사 주기는커녕 맨날 헌 옷과 장난감을 물려받는 것이 일상이어서, 많은 경우 현실을 그저 ‘받아들임’이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 적응력 역시 몹시 뛰어난 듯하였다. 내 동생은 그때 강제로 혼자 외할머니 손에 맡겨진 덕(?)에 우리는 갖지 못한 외할머니와의 찐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았다. 그 시절의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동생의 행복 주머니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내 동생은 그 어린 다섯 살 때부터도, 어쩔 땐 당장 싫고 짜증 나는 상황도 오히려 훨씬 더 좋은 상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배우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둘째 딸들의 효도나 양보를 받을 때에는 일말의 미안한 감정들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 시어머니는 언젠가는 나보다 둘째 시누이에게 더 많은 과일과 고기를 싸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아빠 역시 코빼기도 거의 볼 수 없는 남동생을 챙기는 만큼은 언젠가 여동생도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마도 한갓 나의 바람으로 무언가가 바뀔 확률은 매우 희박하겠지만.


그냥 “나 자신이나 좀 더 부모에게 그리고 동생에게 잘하자”라고 하고 모른 체하기에는 이 세상 둘째 딸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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