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도
# 봉사왕이 된 아이들 이야기 #
"제 어린 시절 친구들은 지금 거의 깜빵에 있거나, 제대로 된 밥벌이도 못하고 떠도는 애들 뿐이에요."
그룹에서 가장 어린 상호가 씹고 있던 밥을 삼키고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갑자기 목이 메어서 말했다.
'어떻게 그 피곤한 3교대의 공장 생활을 하면서, 일 년에 300시간이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거냐'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기엔 당황스러웠다. 그는 보육원 출신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함께 지지고 볶으며 커온 어린 시절 친구들이 같이 보육원을 졸업하고 나서는, 사회에서 자리를 제대로 못 잡아 방황하거나, 심지어 비뚤어지기까지 하여 감옥에 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그 안에서도 남다르게 성실하고 스스로 올바르게 커온 상호는, 십 대 후반부터 자신을 받아준 회사에 감사하며 조금이라도 틈이 날 때마다 무조건 본인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러 달려가는 멋진 사회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와 환경을 원망하는 사람으로 클 때에, 어떤 이들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만큼 더 많이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한다. 내가 상호를 만난 그 '해외 봉사단' 그룹에는 이미 10대에 가장이 되어서 동생들을 건사하고, 여동생 시집까지 보낸다는 동갑내기 친구도 있었다. 사무직 중에서는 그래도 나의 봉사시간이 길다고 대표로 그룹에 끼긴 했지만,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생산직 대표 친구들은 일 년에 나의 수십 배 시간을 봉사에 쓰는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성장 배경 때문에 대학은 꿈도 못 꾸고 일찌감치 공장에 취직한 공돌이 공순이었다. 역시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외국인이 된 언니 오빠 동생들 #
"어떻게 입양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런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당시 대학 초년생이던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며 뭐라고 둘러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사실 입양아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한 채,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형편도 안되고 딱히 외국어 조기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내가, '외국인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영어와 불어를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기를 쓰고 찾다 보니 거기까지 가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어서 참여를 하게 되었지만, 해외에서 온 그들에겐 일생의 정체성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미안하고 부끄러워져서 2주 내내 그 누구보다 한국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 팀에서 기획했던 소그룹 여행도 너무 만족스러웠다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 좁은 책상 위에서 그저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만을 평생 해오면서, 그때까지 내가 배운 세상이라곤 기껏 나의 생활 반경, 그리고 책에서나 막연히 볼 수 있는 것뿐이었다. 입양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봉사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세상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오던 즈음에, 내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많은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기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아이를 버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 세상 저편 어딘가에는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남의 나라 병든 아이들을, 굳이 자원해 데려가 평생 치료하며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잘 키워내 주는 사람도 존재했다. 인류애라는 감정을 나는 그때 처음 배우게 되었다.
# 어른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 #
당시 입양아 고국 방문 프로그램의 일부로 서울의 한 고아원도 같이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그 방문은 입양인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이면서 잔인하게 다가온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기억 속에서 딱히 꺼낼 일이 없어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그로부터 약 9년 후, 사회인이 된 나는 회사의 여러 동호회 중에서 '고아원 봉사활동 동호회'를 선택하였는데, 결연 시설이 어쩐지 낯이 익다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바로 그때 방문했던 적이 있는 ‘성로원’이었다.
그곳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색용 인증샷 찍기 좋은 삐까뻔쩍한 기부 물품보다, 몇 시간이라도 함께 있어주는 시간과, 체온으로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의 크고 따뜻한 품이다. 3~4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방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생면부지의 내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다가와서 팔을 벌리며 그저 서로 ‘안아 주세요’ 하기 바빴다. 대체 모르는 사람이 한번 안아주는 게 뭐라고 그 아이들은 그렇게 갈구하는 것일까.
그 꼬마들과 함께 놀다가 "이제 우리는 갈 시간이야~"하면, 이렇게 짧게 왔다가는 무리 떼가 너무도 익숙한 듯, 단 한 번을 붙잡지도 않고 쿨하게 잘 가라고 손 흔드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의사 표현할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이니 안아달라고라도 다가오지, 그보다 더 어려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하는 한 살 아기들의 방에 들어가면 가슴이 더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 여전히 그곳에 오는 아기들 #
나는 그렇게 한동안 종종 그곳을 들르다, 유학 준비다 뭐다 하면서 점점 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또 약 9년이 지난 시점에야 문득 다시 떠올랐다 그곳이. 그곳은 여전할까. 우리 아기가 태어난 해에도 어떤 아기들은 태어나서 집이 아닌 그곳으로 가게 되었을까.
2020년은 우리 아기가 태어난 특별한 해이고, 그래서 내 아이의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또래 아기들 역시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연말에 그들에게 아주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통화를 해보았더니 당시 그곳에 있는 ‘올해 태어난 아기’는 둘이 있다고 한다. 휴 다행이다 그래도. 내가 갔을 때마다 매번 한 살 아기 방에는 늘 5~6명씩은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임에 일단 안도를 했다.
그러나 이내, 점점 연령별 인구수가 줄어들어가는 오랜 저출산의 당연한 결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바로 스친다. 어쨌거나 두 명인데, 한 명은 6개월 정도 되었고, 한 아기는 불과 20일 전에 태어난 아기라고 한다. 우리 아기는 생후 20일 즈음에 물심양면으로 여러 사람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보살핌을 한창 받고 있었는데.. 그 아기는 또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언급했듯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따뜻한 어른들의 품이다. 아마 한 살짜리 아기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 아기들은 코로나로 인해 그나마 예전의 나와 같은 간헐적 방문자마저 없어서 더 큰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주 일부의 결핍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까 하여 만 하루를 꼬박 고민하여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은 물품들을 골라 성로원 앞으로 주문을 하였다.
바쁘신 선생님들이 연락을 주실 여유는 없을 테고, 배송 완료 문자를 받았으니 되었다. 나는 그 물품들이 언제 어떻게 쓰일지 확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아니고 그냥 직업으로서 출근하는 직원들인 선생님들에게는 어쩌면 딱히 고맙기보다는 성가신 일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라는 것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전달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아이들도 어떠한 형태로든, 한갓 이런 말도 안 되게 미약한 조각들에 불과할지라도, 사랑이라는 것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온다면 좋겠다.
성로원의 지번 주소명은 '성로원 아기집'이다. 이제는 아기가 더 이상 얼마 없고 더 큰 아이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는데, 언젠가는 더 이상 새로 오는 ‘아기’가 더 없어진 '아이집'으로 바뀔 수 있기를. 우리 아이가 주 무대로 살아갈 세상에는 그래도 내가 살았던 세상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훈훈해져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