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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이움 Mar 27. 2023

미국 생활의 필수품: BitchFace

영화관에 갔는데 내 지정 좌석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여기서 당신이 가장 먼저 취할 행동 중 가장 적절한 것 은 무엇인가? 1번, 혹시 내가 좌석을 잘못 알고 있는지 재차 확인한다. 2번, 내 자리를 무단으로 점거한 사람에게 비키라고 다짜고짜 항의한다. 반대로, 내가 영화관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앉은자리가 자기 자리라며 항의해 올 때 적절한 반응은? 1번, 내 영화표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2번,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이 자리는 내 자리가 확실하니 꺼지라고 통보한 후 대화를 끝내고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한국인인 우리는 2번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사회 부적응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미국에서는 2번이 일반적인 행동 양식이다.


내가 겪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번처럼 행동했다. 아무리 확인해 봐도 이 자리는 내 자리가 맞는데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저 아저씨/아줌마는 어째서 내 얘기를 들어볼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미국에 갓 도착한 많은 한국인들이 이것이 없어서 고생한다. 그것은 바로 비치 페이스이다. (해변 얼굴 (Beach Face) 아니고요, X 년 얼굴 (Bitch Face) 맞습니다.) 말 그대로 싸가지없어 보이는 표정인데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는 얼굴이다. 이 무뢰한들로부터 큰 탈 없이 내 자리를 쟁취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인상을 쓴 후 어깨를 펴고 팔짱을 껴서 덩치를 부풀린 상태에서 “No, This is my seat.”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해야 한다. 이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고 일단 한번 부딪혀 봐야 하는 것이다. 그제야 미국인들은 자기 표를 확인하고 여기가 C열이 아니라 D열인 것을 알아챈 후에 떠난다.


(코로나 이전 미국에서는 대도시 번화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영화관은 자율 좌석제였다. 입장권에는 영화 제목과 시간만 적혀 있고 좌석은 알아서 관객들이 골라서 앉는 방식이었다. 코로나가 퍼진 이후에야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제하기 위해 지정좌석제가 도입되었다. 한국인에게 D열 10번 좌석을 찾는 일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아직 많은 미국인들은 지정좌석제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윗 문단에 적은 것과 같은 일들이 굉장히 자주 일어난다. 아바타와 같은 블록버스터 개봉 직후의 주말은 영화가 취미가 아닌 사람도 많이 영화관에 오기 때문에 좌석에 관한 시비는 거의 100% 겪는다고 보면 된다.)


미국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이다. 친절한 말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무서운 표정으로 한번 윽박지르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행태는 비단 한 연령대/인종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손자에게 손수 스웨터를 떠 줄 것 같이 자상한 얼굴을 가진 할머니도 bitch face를 짓고는 나와 좌석을 가지고 실랑이를 한 적이 있다.)


야만적이고 몰상식해 보일 수 있는 Bitch Face 뒤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바탕이 되어 있다. 이 좌석에 앉는 것은 나의 권리이며 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Bitch face이다. 권리란 쉽게 주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쉽게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실천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미국은 독립의 역사부터가 영국 본국으로부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고 또 그 싸움을 통해 본인들의 권리를 성공적으로 쟁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도적으로 독립을 이뤄낸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이 제시한 가치는 미국인들의 영혼 깊이 박혀 있다.


한국에서는 법에 의해 정해진 권리도 눈치껏, 주변에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직장인의 절반 정도가 법으로 주어진 권리인 육아 휴직을 쓰지 못한다고 한다. 그건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때문에 눈치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고 민폐를 끼친 대가로 직간접적인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눈치와 민폐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질 않는다. 휴직 기간 동안의 공백에 따른 결과로 간접적인 불이익까지는 막을 수 없어도 법으로 정해진 권리인 휴직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사회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가진 모습도 장점이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따로 싸우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눈치껏 알아서 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내가 정말 자리를 착각하지 않은 비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더 도태되기 쉬운 사회이다. 당당하게 싸워서 내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곳은 매번 그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사람들이 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곳에선 간혹 내 권리가 침해되어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불합리함이 있다. 어느 곳에서 살고 싶은지는 결국엔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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