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산책을 마치고 현관 입구에서 노령견 다섯 아이들의 발바닥을 닦았다. 우리집은 단독주택인데 공식적으로 드나드는 현관이 없다. 옛 집을 개량했기에 마루 앞에 두껍고 무거운 미닫이 유리창을 설치해 사용한다. 아파트로 비유하면 1층 베란다를 현관처럼 쓰고 있는 셈이다. 성질 급한 우솜돌이 발바닥을 가장 먼저 닦고 '우우'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닦지 않은 나머지 아이들이 이때다 하며 우솜돌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갈까봐 무거운 문을 닫았다.
두 번째 들여보낼 아이 발을 닦으려다 나는 무심코 유리창 안을 들여다봤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우솜돌이 어느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서로 눈빛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머뭇거림이 어렸다. 순간 나는 심장이 얼어붙었다. 우솜돌의 눈빛은 머뭇거림을 넘어 슬픔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가 넘어가려는 문턱,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는 듯 미묘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우솜돌은 말기폐암을 앓고 있었다. 암덩어리를 떼어낸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터였다. 우솜돌이 머지 않아 죽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반려견에 대한 의인화가 너무 지나친 것인가? 혹은 내가 죽음을 투사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삶에는 무수한 암시가 등장하곤 하는 법이니까. 대표적인 것이 예지몽이다. 반드시 꿈이 아니어도 어떤 현상들은 미래에 다가올 사건을 미리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갑자기 우솜돌을 붙잡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내 혀와 팔다리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다. 그는 눈길을 거두고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알고 있다. 올 해 4월 초에 폐에 달라붙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으니 곧 항암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항암 치료를 앞두고 딜레마에 빠졌더 것이다. 항암을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 개들은 아주 빨리 떠난다고 한다. 물론 더러 예외가 있다. 우솜돌은 만 13세다. 개로 태어나 평균 수명을 완료한 셈이다. 정작 문제는 불치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는 것이 아니다. 폐에 물이 찬다든지 오랫동안 호흡이 곤란하다든지 예기치 않은 힘든 상황들과 직면할 지도 모른다. 새벽에 깨어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나를 떠올렸다. 한숨부터 나왔다. 이 한숨은 누구를 위한 한숨인가? 잠이 많은 나인가, 아니면 아픈 우솜돌인가?
항암 또한 식욕을 잃고 구토와 설사를 지속하는 등 부작용이 있다. 무엇보다 다른 반려가족들과 격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인간과 달리 동물의 항암은 신체적인 고통이 덜하다고 한다. 경제적인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솜돌의 고통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술 이전부터 나는 온라인 카페에 가입해 폐종양과 항암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사례를 살펴보니 '케바케'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우솜돌 몸 속에서 폭죽처럼 터져 빠르게 퍼져가는 암세포들이 너무나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면 괴로웠다.
암세포는 아이를 괴롭힐 것이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더더욱 항암을 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 노령견 다섯 아이는 제 각기 위험한 질병을 갖고 있다. 의료비가 만만치 않다. 생각이 막힌다.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우솜돌..." 나지막하게 불렀을 뿐인데 방석 위에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든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면 다른 아이들은 방석에 누워 게슴츠레한 눈을 뜨곤 하는데 우솜돌 혼자 꼬리를 흔들어왔다. 그의 작은 눈에는 장난끼와 친밀감이 한가득이다. 그래, 항암을 시작하자.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우솜돌을 방치해두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인간은 언어를 쓰고 소통하지만 우솜돌과 나는 그리 할 수 없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면 나는 항암과 관련한 그의 생각을 존중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음을 막을 방법은 없으니까.
어느 날 나는 우솜돌을 '느꼈다'라고 생각한다. 산책을 마친 뒤였다. 그 날은 4월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이었다. 들판의 마른 풀을 눕히며 찬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회색 구름을 흔들고 갯버들가지를 춤추게 했다. 아이들은 바람을 맞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산책을 하면서도 또 다시 나는 항암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사실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해 왔으면서도 대화할 수 없다. 한편 늘 언제나 끊임없이 대화한다. 반려가족 특히 반려견을 가족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눈빛으로 혹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 개가 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우솜돌은 조수석 카시트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이들의 스쿨버스인 쌩돌이는 즉각 아이폰을 탐지해 노래를 흘러보냈다. 우효의 '청춘(Day)'이었다. 몇 번 반복해 들었을 뿐 별 감흥 없는 노래였다. 그런데 그 날은 어쩐 일인지 습자지에 젖어드는 물기처럼 첫 가사부터 가슴 한 켠이 뭉근해졌다. 놀라 깨는 버릇, 분리불안증을 심하게 앓고 어둠을 싫어하는 아이. 한 쪽 눈가가 묘하게 항상 젖어 있는 아이. 그런 아이가 너를 비추는 별이 되고 싶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나는 오랫동안 노래에 귀기울였다. 항암이 무엇인지 우솜돌은 모르지만 그런 식의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와는 달리 죽음 혹은 죽음에 따른 고통 따윈 우솜돌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솜돌에게는 나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인간처럼 지능이 높지도, 지식이 많지도 않은 이 개라는 동물은 역설적으로 상상하지 않아 공포가 덜하고 정보가 없기에 두려움이 없다. 유일한 두려움이라면 시각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사라져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천진난만한 이 아이는 늘 밥시간이 되어 배식이 시작되면 꼬리를 흔들고 방 안에서 몇 바퀴를 돌다 밥그릇을 덮칠 듯 앞발을 든 뒤 사료에 입을 대는 행동을 의식처럼 치룬다. 또 나와 아이들과 산책을 하고 엄마 다롱이와 동생 까비를 가끔 핥아주다 잠이 드는 시간들이 주어진 견생의 모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솜돌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해 사과한다. 그 맛있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독한 방에 혼자 두었다. 어디에서 너의 별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