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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고 Dec 12. 2016

갖고 싶은 책을 만났을 때

돈이 없어야 가능한 경험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아직 남아서

눈에 보이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갔다.

처음 중고서점이 생긴다고 했을 때는 마음이 들떴었지만

막상 책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곤 했어서 

책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들어간 곳이었다.


서점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이곳저곳 책을 구경하는데 한 권의 책이 눈에 꽂혔다.

그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다.


웃긴 건 그 날 아침 시간 나면 읽으려고 가방에 넣어 온 책도 위대한 개츠비였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미 위대한 개츠비가 있고, 아직도 읽지 않았고, 심지어 가방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출판사만 다를 뿐인 그 책이 너무나도 사고 싶었다.

왠지 원서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도 들었다.(번역본도 안 읽으면서...)


책의 가격을 보니 3500원이었다.

문득 이런 깨끗한 중고 책을 이 가격에 카드로 사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뒤져보니 100원짜리까지 모두 모아서 정확히 3500원이 있었다.

순간 나는 거지인가,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이 책을 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0원만 모자랐어도 이 책을 사지 못 했을 테니까.


천 원짜리 세 장과 백 원짜리 다섯 개를 주고

중고서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사서 나오는데 기분이 무척 좋았다.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에,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게 뭐냐고 물어볼 일에

나는 마치 운명의 책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건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나는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책을 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내 책'은 언제든 천천히 내 옆에 두고 읽을 수 책이고,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이 치여서 언제나 뒷전이 되고 만다.

하지만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문득 서점에 들어가서

갖고 싶은 책을 만나고, 딱 그 책을 살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던 기억.

텅텅 빈 지갑 대신 나의 책을 갖게 된 기억.

그 기억은 너무나도 사소하지만 어쩌면 누구나 갖지 못하는

나 역시도 다시 만나지 못할 기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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